"정말 재미없었어요!" 아이들의 일갈에 귀를 기울이며
3년 전의 일이다. 서귀포의 한 도서관으로부터 '어린이를 위한 제주4.3 교육'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제주4.3을 소재로 다룬 유명한 그림책 <나무 도장>(평화를품은책)을 읽고, 그 외에 제주도에 관한 몇몇 그림책을 골라서 수업을 준비했다. 서귀포 지역 초등학교에 다니는 3~6학년 어린이들은 표정으로 이미 대답을 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업이 마무리될 즈음에는 마치 들고일어날 것 같은 기세였다. "수업이 재미 없었지?"하는 자신 없는 물음에 돌아온 대못 같은 대답.
"정말 재미없었어요!"
그 순간 목구멍까지 어떤 말들이 밀려들었지만 꾹 눌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가만히 듣고 있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너무나 게으르고 손쉬운 수업 준비였다. 어린이를 감동시키려면 어른이 고민하고 상상하고 공들여야 한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3년 전에 비해서 지금은 제주4.3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많이 알려졌다. 특정한 기간에만 이루어지던 4.3교육도 요즘은 1년 내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4.3교육은 문제가 없는 걸까? 제주4.3의 기억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교육법이 어린이들에게 어느 정도 호소력이 있을까? 어린이들에게 반론을 들은 후부터 나의 고민은 깊어졌다. '이건 아닌데' 하는 막연한 회의감만 안개처럼 맴돌았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3년만에 꺼낸 나의 대답, '4.3 없는 4.3교육'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4.3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무르익을 즈음, 운명의 장난처럼 지난 4월7일 서귀포 동부도서관에서 똑같은 주제의 강연 요청이 왔다. 서귀포에 있는 새서귀초등학교, 하례초등학교, 효돈초등학교, 동홍초등학교, 토평초등학교에 다니는 4학년~6학년 어린이들과 함께 하는 수업이었다.
이번에는 3년 전과는 전혀 다르게 접근했다. '제주도' 또는 '4.3'처럼 틀에 박힌 소재를 없앴다. '글자 없는 그림책'처럼 이른바 '4.3 없는 4.3교육'을 선보였다. '4.3없는 4.3교육'은 어린이에게 제주4.3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을 가르치는 것을 최소화하는 대신 어린이 스스로 알고 있는 제주4.3에 대한 지식을 전혀 다른 사건과 연관시킬 수 있도록 도왔다.
어른들이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가르치는 방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어린이들이 스스로 상상하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린이들이 자라서 4.3을 이야기하려면 스스로의 지식과 상상력으로 제주4.3을 재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림책 <강물이 흘러가도록>(시공주니어)를 함께 읽었다. 미국 뉴잉글랜드 주의 아름다운 스위프트 강 골짜기에 사는 어린 소녀가 이웃 대도시 보스턴 사람들에게 물을 대기 위해서 마을이 잠기는 과정을 시적인 감성으로 전하는 이야기다. 1927년~1946년 사이에 실제로 벌어진 일이니 제주4.3이 일어난 1948년과 묘하게 겹친다.
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를 다른 마을로 이주시키고 물이 뒤덮인다는 이야기는 중산간 마을을 해안선으로 강제 이주시킨 '소개령'과 중산간 마을 전체를 태워버린 '초토화작전'을 떠올리게 한다. 스위프트 강 골짜기가 물로 뒤덮였다면, 제주도는 '불'로 뒤덮였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어린이들에게 먼저 자신이 알고 있는 제주4.3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할 기회를 준 다음 부족한 부분 또는 잘못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 보충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림책 <강물이 흘러가도록>을 읽어주고 나서 제주4.3과 연관되는 점이 무엇인지 물었다. 제주4.3은 1948년 제주에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2019년 세계 어딘가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의 대답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을 몇 개 옮긴다.
"친구들끼리 헤어지는 부분에서 4.3에서 엄마와 아빠랑 헤어지는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이영준 어린이, 서귀포 하례초등학교 4학년)
"아빠랑 딸이랑 요트 위에서 얘기하는 장면 좋았어요 ." (전은빈 어린이, 서귀포 동홍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들의 소감을 반영해 함께 동시를 썼다. 아래는 동시 전문.
물과 불이 삼켜 버린 마을
맑은 물이 넘치고 나무와 새, 곤충이 뛰놀던 스위프트 마을은
제물이 되었네
큰 도시 보스턴 사람들의 욕심에 희생되었지
똑똑한 말에 속아 넘어가 이웃과 친구들은 헤어졌네
제주도 사람들을 흩어버린 건 불이었지만
스위프트 마을 사람들을 흩어버린 건 물이었네
긴 시간이 흘러 우린 다시 여기 있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순 없었던 걸까?
물로 덮고 불로 태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걸까?
물로 뒤덮인 스위프트 옛 마을 터와
미세먼지로 뒤덮인 제주의 하늘이
따져 묻는 것 같네
동시를 쓰고 나서 각자 한 행씩 정해서 그림을 그렸다. 이를 한데 모으니 그림책처럼 재밌고 감동적이었다. 초등학생의 진한 감성이 좋았고 서투른 솜씨가 더 진솔해서 행복한 구경이었다. 함께 동시를 쓰고 상상해서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제주4.3에 대한 생각이 자리잡는 느낌이 들었다.
3년 전과 달리 올해 수업을 받는 학생들의 표정은 내내 밝았고 호기심 가득한 모습이었다. 2차 세계대전과 미군정 시기, 남한 단독선거 등 다소 어려운 역사 용어를 썼지만 끝까지 경청하는 모습이 대견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소감을 물었다.
"그림 그리는 활동이 재밌었어요." (전은빈, 동홍초 4학년)
"제주 4.3을 다른 이야기로 풀어내니까 더 재밌었어요."(전지웅, 동홍초 5학년)
"제주4.3에 대해서 아기가 말발굽 치인 거랑 미군과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몰랐는데 알게 되어서 좋았고 재밌었어요." (이영준, 하례초 4학년)
제주4.3교육의 미래라고 거창하게 말을 꺼냈지만 어떤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다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린이들의 욕망을 해석해내는 어른들의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린이들은 표정으로 또는 짧은 소감으로 '제주4.3교육의 미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이야기했다.
이제는 고유명사에서 '형용사'가 되어 특정 시기, 특정 공간에 한정되지 않고 '4.3적인 것'들을 찾아서 연관짓는 연습을 해야 한다. 제주4.3이 어른들에게는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고유명사일지 몰라도, 자라날 어린이에게는 다양하게 변주되는 형용사여야 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의 유연하고 재밌는 상상력으로 제주4.3의 기억이 완성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