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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최선입니까?"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오래전 장안의 화제가 될 정도로 아주 재미있어서 즐겨보던 TV드라마에 나오는 대사 한 마디가 오랫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아주 젊은 CEO를 연기한 현빈은 아버지뻘, 최소한 삼촌뻘은 됨직한 늙수그레한 부하직원들을 즐비하게 앉혀놓고 질책의 의미로 늘상 이렇게 말했다.

"그게 최선입니까?"

그러면 직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중 아무도 현빈에게 똑같은 물음을 던지지 않았다. "그러는 너는 최선입니까?" 그랬다면 극중 현빈은 무어라 대답했을까?

그 말은 매우 폭력적인 권력자만의 언어이다. 그 말은 반격의 의지를 상실케 한다. 그 말에 대한 반응은 기계적으로 우리에게 내면화 되어 있어서 자기검열이 작동되는 아주 악의적이고 자기 통제적인 말이다. 누구도 그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부부는 아들이 둘 있다. 우리 아이들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살아내고 있을 때, 우리 부부는 너무 걱정스럽고, 괴롭고, 힘들고, 해결책을 찾을 수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헤매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뭔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런저런 교육과 책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런 류의 교육, 책에는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이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부모의 잘못을 지적질 해댔다. 그런 교육을 받고 오면 우리 부부는 자책으로 더욱 심하게 우울했고 힘들었으며 전의를 상실했다.

그들에 의하면 모든 것이 부모 책임이라는데 우리 부부가 그토록 형편없는 사람인가? 한편으론 너무 억울하기도 했다. 우리가 무얼 그리 잘못했나? 그래도 거기에 답이 있으려니 믿고 마음을 다잡고 그 주변을 기웃거렸다. 그들은 한결같이 우리 부부에게 물어댔다.

"당신은 최선을 다 했나요?"

그러던 중 대안교육으로 자녀 교육에 성과를 보인다는 한 커리큘럼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도 어김없이 나름 성공했다는 강연자들이 하는 말은 부모의 부족함을 꾸짖는 내용이었다. 나는 내심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강연자 중 유독 엄한 교육과 맹모삼천지교를 가르치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에게 나는 물었다.

맹자 어머니는 맹자의 교육을 위해 학교, 시장, 묘지 옆으로 이사를 해서 맹자를 교육했는데, 그게 요즘 아이들 교육에 극성을 떨어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강남 사모님들과 무어가 다른가요? 그리고 학교, 시장, 묘지에는 맹자 말고도 많은 아이들이 있었을 텐데 그 아이들도 모두 맹자처럼 대성 했나요?

모든 사람이 부모가 된다고 어느 날 갑자기 전지전능한 신이 되지는 못한다. 그런데 그들은 그래야 된다고 나를 윽박지르고 있다. 부모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자는 게 아니다. 그냥 부모 또한 부족하고 때론 무능하며 실수투성이인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라고, 그런 그들에게 아픈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따뜻한 위로의 말일 수도 있다.

"그래요 그럴 수 있죠. 우리는 모두 그런 실수를 하며 살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우리 아이들에겐 부족하나마 우리가 전부인걸요. 힘내세요. 우리 함께 의논해 봐요."

힘들고 괴로운 사람 누구에게도 질책보다는 공감과 위로가 더욱 절실하다. 거기서 문제에 직면하고 대응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우리 집 사과밭 위로는 제법 깊고 큰 산이 이어져 있다. 그 산은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누군가 가꾸거나 하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산이라서 내가 다 알지 못하는 많은 종류의 식생이 있다. 사람이 가꾼 것에 익숙한 내게 산의 모습은 왠지 무질서해 보이고 쾌적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 산에게 나는 묻는다.

"이게 네 최선의 모습이니?"

그 산에는 가끔 아름드리 나무가 쓰러져 죽어 있기도 한다. 그 나무에게도 나는 묻는다.

"다 큰 어른이 어쩌다 이리 됐니? 최선을 다해 살지 않았구나?"

텃밭에 고추모종을 몇 개 심었는데 유독 한 녀석만 크지도 못하고 죽었다. 난 그 고추에게 물었다.

"다른 녀석들과 똑같이 해줬는데 너만 죽는 이유가 뭐니? 최선을 다하지 않았구나?"

우리 모두는 이러한 의문이나 질책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어리석은지 잘 알고 있다.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야... 최선의 문제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어떤 행위를 할 때, 즉 행위 동기의 문제이고 그 두 번째는 결과로서의 문제이다.

우리는 흔히 결과만 보고 최선의 여부를 판단하는 우를 범한다. 결과가 잘못됐다 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결과가 좋다 해서 최선을 다했다 할 수 없듯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에 대한 평가는 행위의 정당성에 있지 그 결과에 있지 않다. 또한 사람마다, 아니 개별적 존재마다 모두 그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획일적 기준으로 평가할 수는 더더욱 없다.

누군가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 그 결과에 대한 희망 섞인 예측을 전제로 하는데 이때의 예측 및 선택, 행위는 그 나름 주어진 범위 내에서 최선의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떤 존재가 자기에게 해로운 선택을 하겠는가. 혹자는 이때 무식해서, 안이하게, 또는 방심해서 한 행위는 최선이 아니다 할 수 있으나 그 또한 그 상황에서는 최선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현재는 그들이 과거에 행한 최선의 행위의 결과이다. 따라서 "최선을 다 했느냐?"는 물음, 또는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사족이거나 상대에 대한 폭력이다. 물론 앞으로 더 잘 하기 위해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행위는 나쁘다 할 수 없으나 과거에 대한 부정이나 질책을 위한 용도로 이용돼선 곤란하다.

그냥 쿨 하게 "그때 그 상황에서는 그 판단이 최선이었지만 결과가 좋지 못했으니 앞으로 똑같은 상황이 닥치면 다르게 행동해야지" 즉 그때는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를 이제는 알았으니 지식과 경험으로 축적해서 지혜로워질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면 된다. 최선을 남에게 강요하는 경우 그 폭력성의 심각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 자신에게조차 최선을 다 했느냐고 묻지 말자.

#자녀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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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50년 넘게 살다 지금은 강원도에서 농사지으며 살고있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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