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남들은 가족들이며 연인이랑 꽃놀이 가는 5월인데 우린 규탄 기자회견 한다고 전남까지 원정 가는 거 좀 억울하지 않아요?"
기자회견 하러 무안에 가는 차 안에서 동료 중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했고, 함께 탄 우리는 깔깔깔 웃었다.
필자가 근무하는 광주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가 지원하던 사건의 가해자가 경찰 공무원이었다. 엄청난 투지가 일어난 건 가해 당사자와 피해자 간의 대질신문에 신뢰 관계인으로 동석했을 때였다. 바들바들 떨면서 당시의 상황을 진술하는 피해자와 달리 가해자는 시종일관 웃음 머금은 표정으로 "장난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이야기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모르세요? 지금 당신은 범죄 피의자로 이 자리에 앉아 계신다고요."
다행히 검찰은 기소를 결정했고 우리는 경찰서 측에 직위해제를 요구했다. 재판 결과가 나오면 징계위원회를 열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지난한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가고 광주지방법원은 약식명령 "성폭력특별법 위반, 벌금 300만 원"을 선고했다. 제대로 된 내부징계를 기대하며 경찰서로 전화를 했다. 그러나 경찰서 측의 결정은 '감봉처분'이었다. 감봉은 경징계에 속한다. 항의를 하자고 결정했고, 여러 단체들에게 연대를 요청했다.
기자회견 10분 전, 해남상담소가 제일 먼저 도착했고, 고흥, 여수 상담소도 속속 도착했다. 금세 기자회견장이 빼곡하게 찼다.
"정말 감사드려요.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상담소에서 일하면서 가장 많이 배운 건 우리 여성들의 연대였던 거 같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기자회견을 마무리하며 깊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5월의 햇빛은 뜨거웠고, 우리들의 연대는 따사로웠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오늘은 강남역 여성살인사건 3주기다. #나는살아남았다 라는 문구는 여전히 그 문구만으로도 가슴을 저릿하게 만든다.
여전히 여성들은 남자들 사이에서 "물(좋은)개(스트)"로 취급당하고, 누군가 건네는 술잔은 호의가 아닌 "약물강간의 가능성"이며, 공중 화장실에 뚫려있는 구멍들은 나를 타깃으로 한 불법촬영의 다른 이름이다.
여전히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피켓을 들고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있으며, 성폭력 피해 여성에게 "왜 그 시간에 돌아다녔냐?"라고 하는 경찰의 질문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2016년 살아남은 여성들이 "#우리는_서로의_용기다"라며 손 맞잡고 이루어낸 것들을 생각한다.
2016년 "#나는살아남았다" 라며 이어가던 고백들이 2018년 #미투 운동으로 확장되고, 우리 사회에서 한 번도 논의된 적 없던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사회 의제가 되었다. 나아가 2019년엔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헌법 불합치 의견을 이끌어냈다. 또한 소라넷 폐지, 불법촬영 관련한 혜화역 시위 등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이전과는 다른 양상과 힘을 지닌 여성들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써놓고 보니, 몇 줄뿐인 이 단순한 문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했던 일들이 떠오른다. 지난해엔 겨울 외투에 목도리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청계광장에 모여 "미투 2018분 이어말하기"를 했다. (관련 기사:
"잊지 못 한다, 그래서 고발한다" 34인의 '미투' 릴레이) 다음날까지 이어지는 말하기를 지키기 위해 은박지와 종이 박스로 바람을 막으며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있던 여성들의 모습을 기억한다.
2017년 9월 "나는 임신과 낙태를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라며 '낙태죄 폐지' 촉구 기자회견장에 울려퍼지던 낙태 경험 당사자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 직후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지금껏)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며 환자를 돌려보낼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 한 산부인과 의사의 눈물과 고백을 기억한다.
'안희정 전 도지사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 유죄 판결이 났던 날, 광주지방법원 앞에 모여 "유죄 판결"에 환호하기도 했다. "이제 진실을 어떻게 밝혀야 할지, 어떻게 거짓과 싸워 이겨야 할지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려 합니다"라는 피해자의 입장문을 함께 나누다 울컥 눈물이 쏟아졌던 그 날의 '나'와 또 다른 '나'들을 기억한다.
이어달리기는 계속 된다
어릴 적 '이어달리기'의 기억을 모두가 가지고 있을게다. 운동회의 하이라이트에 '이어달리기'가 있었다. 이어달리기를 위해 필수적인 건, 앞에 달리는 주자를 계속 지켜보는 일, 그 주자가 나에게 왔을 때 가장 편하게 배턴을 줄 수 있게 내 손의 위치를 고민하는 일, 그리고 다시 나의 뒤를 이어 달릴 주자를 위해 온 힘을 다해 뛰는 일, 그 마지막 주자가 1등이 되지 않더라도 함께 어깨를 토닥여주는 일이다.
나는 최근, 우리가 만들어 온 시간들이 여성들의 '이어달리기'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고통을 호소하는 그녀에게 시선을 맞추고, 고통에 주목하며 그녀의 '곁'에 머물고, 그 고통의 개별성을 나의 것으로 가져오기 위해 애쓴다. 더불어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느끼는 것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가능성을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다.
그렇게 만든 지금의 '변화'가 결국은 우리가 함께 이룬 일이라는 걸 이야기 하고 싶다. 함께 싸우고 지탱해온 그녀들과 나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다. 아직은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김미리내님은 광주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