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지난 9일 '인재영입 6호'를 발표했다. 주인공은 홍정민 로스토리 대표. 민주당 측은 홍 대표를 "경력단절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여러 분야에서 성취를 낸 여성 인재"라고 소개했다.
이해찬 대표는 홍 대표를 치켜세우며 "제 딸하고 나이가 같은데 생각의 차원이 다르다"며 "제 딸도 경력단절자인데 열심히 뭘 안 한다"고 언급했다. 경력단절을 '노력'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 깔린 발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여성들이 개인적 차원의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는 걸까?
나는 대기업의 디자인실에서 10년 가까이 일한 시니어 디자이너였다. 직장을 그만둘 때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프리랜서가 될 수 있는 직종이라 다행이라고 여겼다. 아이를 낳고 일 년이 지나면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순진하게 믿었다.
어린이집에 보냈지만 하루 4시간 일하기가 어려웠다. 일을 받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는 열이 났다. 업무에 집중할 수 없이 맥락이 수시로 끊겼다. 배우자의 협조도 주변 가족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되도록 빠르게 마칠 수 있는 단발성 '아르바이트' 였는데, 그런 일만 하다가는 저임금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커리어를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이 돈 받자고 내가 이렇게 밤을 새워야 하나.'
'아이 보지 않고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인가.'
나는 일과 양육의 가치를 비교하도록 내몰렸다. 충분히 배웠으며 전문 분야를 가지고 있었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지만, 이걸 실현하는 건 나의 헛된 욕심이라고 되냈다. 결국 포기했다.
돌봄 노동에서 제외된 남성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그런데 아이가 있는 여성이 직장에 다니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네 명의 여자가 필요하다고 한다.
도우미, 자매,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여자가 일을 하려면 돌봄의 공백을 메워줄 수 있는 추가 조력자가 상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버는 돈은 도우미를 구할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설사 구한다고 하더라도 가정의 일은 '외주 서비스'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서비스는 자잘하게 쪼개져 있다. 외부 관리 역시 여성의 몫이다. 그래서인가. 내 주변에 일하는 여성들은 99%도 아닌 100% 조부모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도 친정엄마에게 매달렸다. 차로 3시간 거리에 사시고, 심지어 심장 질환이 있는 아픈 엄마를 불렀을 때까지만 해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남편은 야근으로 새벽에야 집에 들어왔고, 엄마와 나는 우리 둘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만 여겼다. 한 명의 여성이 자기 일을 지속하기 위해 주변 모든 여성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단 한 명, 가장 가까운 가족인 남편이 여기에서 제외된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남성 육아휴직 비율이 전체 육아휴직자 중 21% 가까이 되도록 늘었다지만(2019년 한국고용정보원 통계자료) 주양육자는 여성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강하다. 기업의 남성중심 문화는 장시간 근무를 조직에 대한 충성이자 성과지표로 여기면서 하루 열 시간 이상 일하지 않으면 당장 회사가 망할 것처럼 호들갑이다.
남편 역시 조직의 요구에 저항하지 못하고 가족보다 회사에 헌신했다. 상사의 눈총이 아내의 절박함보다 중요했다.
'경력 단절'이라는 잔인한 말
성별 임금 격차는 여성에게 자신의 일보다 남성의 일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했다. 남편 돈 받으며 알뜰하게 살림하는 걸로 만족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사회인으로서 내 능력을 실현하고 인정받고 보상받고 싶었다. 경제적 자립을 유지하고 싶었다. '엄마'라는 정체성으로 나의 전부를 채우고 싶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돌봄과 가사를 돈벌이나 자기실현에 비해 가치를 낮게 취급한다고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묻고 싶었다. 그래서 가정의 일이 가치 있다면 왜 대부분 남자들은 왜 가사노동을 기피하려 하는가. 왜 가사 및 돌봄 서비스 종사자들에게 고소득을 주지 않는가. 왜 육아휴직을 하면 불이익을 주는가.
'경력 단절'이라는 말이 언뜻 보기에 합당해 보여도 기만적이며 잔인한 이유다. 사회는 육아와 모성을 칭송하면서도 그 시간에 헌신하면 잉여의 존재가 됨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보내고 집에 있는 엄마들을 논다고 보는 시선은 이렇게 나온다.
보육기관들은 아무리 늦어도 오후 3~4시에 끝난다. 학교에 들어가면 더 빨라진다. 방학은 길다. 그러나 회사는 아무리 빨라도 오후 6~7시에 끝난다. 국공립 보육 기관은 자리가 없고 외주 서비스 비용으로 내 급여 대부분 써야 한다. 퇴근하면 허겁지겁 집으로 출근한다. 경력 단절 여성들은 사회가 비용을 들여 치르지 않는 돌봄의 공백을 자신의 시간으로 메우게 된 사람들인데 사람들은 도리어 엄마들을 비난한다.
여성이 자신의 일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지 않고 경력이 단절되도록 내몰고서 경력 단절 여성들을 무능력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경력 단절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면 무리한 욕심을 부리며 가족들을 힘들게 한다고 한다.
다시 일할 수 있는 조건
이래도 저래도 비난받는 분열된 상황에서 나를 구출해야만 했다. 우선 아픈 엄마를 더 이상 부르지 않기로 했다. 칠십이 넘은 약한 여성이 아니라 마흔의 건강한 남성이 돌봄을 나누는 것이 마땅했다. 내가 육아를 전담해준 덕에 승진도 연봉 인상도 착실하게 해온 남편이지만 이제 우린 가족의 일을 나누어지기로 했다. 일 년 넘게 치열하고 처절하게 싸운 끝에 합의에 도달했다.
첫 번째. 남편이 육아 휴직을 냈다. 두 번째. 아이가 아플 경우 남편 역시 휴가를 썼다. 그제야 나는 일을 안정적으로 지속할 수 있었고, 기회가 쌓여 취업으로도 이어졌다.
순전한 나의 노력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양육의 책임이 여성에게 있는 현실에서 여건이 받쳐주지 않으면 여성은 일을 할 수 없음을 4년 넘게 체험했다. 배우자와의 협력. 제도적 지원. 근무 환경. 경력에 맞는 업무. 육아에 대한 배려. 모든 것이 극적으로 맞은 덕이었다.
그러나 모든 남성이 육아휴직을 쓸 수는 없는 실정이다. 제도를 이용할 수 있어도 당장 소득이 없거나 남편보다 적은 여성 대부분은 협상력을 가지지 못한다.
'남편 직장 그만두게 할 거냐', '돈 벌어오면 육아를 나누겠다'는 말을 들으며 의욕이 꺾인다. 돈을 벌어도 가사와 육아 분담은 요원하다. 설사 배우자가 협조해준다고 하더라도 기업의 장시간 근무와 성과주의 압박에 좌절한다.
그래서 가족 구성원 간의 노력만으로 여성의 경력 단절은 해결될 수 없다. 부부가 벌이를 떠나 육아를 나눌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이 선행되어야 한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출산휴가, 육아 휴직, 육아 시간을 공히 보장해야 한다.
남성 중심의 장시간 근로, 회식 문화는 사라져야 한다. 양질의 공공 보육 서비스도 확충해야 한다. 이러한 제도적 지원은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근무자만 누리는 혜택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기업이나 가정에 떠맡기지 말고 정부가 주체가 되어 시행해야 하는 이유다. 저출산 대책 한답시고 지난 13년 동안 허공으로 날려버린 153조 원으로 이걸 못 할까.
경력 단절 여성에게 너는 왜 노력하지 않았느냐고 하기 전에 왜 정부는 노력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다. 경력 단절은 결코 개인의 '극복' 문제가 아니다. 언제까지 사회가 치러야 할 비용을 개인에게 떠넘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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