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대학 동기를 만났다. 각자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사느라 바빠 자주 보지 못했지만, 배낭여행을 몇 달간 다니면서 한 번도 싸우지 않았을 정도로 잘 통했던 친구라 몇 년 만에 만나도 여전히 반가웠다. 서로의 안부와 일상에 대해 말하다가 자연스럽게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전환되었다.
친구는 3년 전 전세 4억으로 살았던 아파트가 매매가 5억에서 13억까지 올라 너무 속상했는데 100대 1의 행운으로 하남 아파트에 당첨이 되어 이사온 지 1년 만에 4억이 올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 세대가 IMF도 아니고 더 이상 아파트로 자산을 키울 수 없는 세대라 굳게 믿고 있었는데 친구의 말을 들으니 갑자기 속이 탔다.
그즈음 직장 동료가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인 의사 친구 부부 이야기를 꺼냈다. 비슷한 또래 아들을 키워 자주 만나는데, 만날 때마다 아파트 갭 투자로 돈을 벌어야 현명한 삶이라 충고한단다. 그들이 무슨 과 의사냐고 물으니 정신과 의사들이고 시간이 많아 온종일 컴퓨터로 아파트만 보고 산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 몇 년 동안 몇십억이 넘는 시세차액을 남겼다고. 의사 부부는 청약점수를 높이기 위해 장인 어른과 세대를 합치는 등 위장전입을 비롯 온갖 방법을 동원해 아파트 투기에 열을 올렸단다. 의사가 부업처럼 보이는 그들 이야기를 들으며 일을 하고 있으니 다 그만두고 당장 부동산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일어났다.
결혼하고 3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을 정산을 해보니 1억 정도 되었다. 왠지 남들보다 빠르게 큰 돈을 모은 것 같아 뿌듯했고 열심히 노력해 일한 보람이 느껴졌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만족할 만큼 벌 수 있는 삶을 산다는 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아파트만 한 채 있으면 아니 딱 두 채만 있으면(시세 차를 내려면) 평생 엉덩이를 아파트 바닥에 붙인 채 꼼짝 않고도 몇 십억씩 순식간에 벌 수 있는 믿기지 않는 현실을 알아버렸다. 내가 일해서 버는 돈과 아파트가 오르는 시세는 무궁화와 KTX 속도 차이였다.
우울했다. 아무리 만족도가 높아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노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혼까지 털어서 아파트를 미리 사두지 않은 내가 어리석어 가슴을 쳤다. 문재인 정부를 믿고 이제 아파트는 절대 오르지 않을 거라 확신했던 약삭빠르지 못한 남편이 미웠다. 서울 태생이면서 집 한 칸 없는 시댁도, 지방에 오르지도 팔리지도 않는 건물과 땅만 있는 아빠도 원망스러웠다. 갑자기 아파트 때문에 우울감과 무기력감으로 한순간에 일상이 뒤틀려버렸다.
'아파트만 있었으면...' 여행 내내 머릿속을 맴돈 생각
복잡한 생각을 지우고 못난 감정들을 비우고 싶어 휴가를 내 떠났다. 따뜻한 날씨와 편안한 숙소가 기분을 한결 좋게 해주었고 낯선 환경들이 잠시나마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여행이 좋아지면 질수록 '아파트만 있었으면 더 여행도 많이 다니고 더욱더 행복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패키지처럼 따라다녔다. 나도 모르게 자꾸 이어지는 이런 생각이 너무 괴롭고 못나서 남편에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아파트는 여행 내내 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여행 중간쯤 남편과 아이가 낮잠을 자는 동안 유튜브를 우연히 검색하다가 신년특집으로 기획된 <PD수첩> '우리가 아파트를 살 수 없는 이유, 집 있는 사람들의 나라'를 보게 되었다. 최근 서울 강남 아파트가 뉴욕 맨해튼보다 평당 가격이 비싸졌단다. 강남의 일부 아파트는 평당 1억이라 24평이면 24억이라고 한다.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은 불과 5년 사이에 일어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부자가 되었는지를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가지 시선으로 분석해주면서 온 국민이 아파트라는 광기 어린 도박에 빠져있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지금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불안전하고 투기성 가득한 상황이라 분석하였다. 온 종일 거리에서 고된 배달 일을 하는 사람은 원룸에 살면서 아파트만 보면 자신의 처지를 비웃는 무시무시한 괴물 같이 보인다고 말했다. 홀린 듯이 영상을 모두 보고 아이팟을 챙겨 공원으로 나왔다.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호수 곁을 씩씩거리면서 걸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알 수없는 억울함과 분노가 가득한 한바탕의 눈물을 쏟고 난 뒤 갑자기 웃음이 났다.
'아, 내가 못나고 이상한 게 아니라 나라가 미쳤구나. 내가 미친 나라에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야릇한 마음으로 산책을 하고 숙소로 들어가니 남편과 아이가 깨 바다에 갈 채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오후 노을 지는 해변 일렁이는 바닷속에서 오랜만에 모든 것을 잊고 아이와 신나게 놀았다.
꿈같은 짧은 휴가를 마치고 다시 일상, 일전에 만났던 대학 동기가 카톡을 보내왔다. "대박 로또 분양 3곳. 총알 모으다가 거지 된다. 무조건 아파트다." 피식 웃음이 났다. 좋은 정보 줘서 고맙다고 전하고 알려준 로또 분양 3곳을 저장해두었다. 친구에게 내가 잊어버릴 수 있으니 분양 기간에 다시 알려달라고 부탁하자 담청되면 한턱이 아니라 백턱을 쏴야 한다고 당부한다. 그런데 집도 있고 직업도 있는 사람이 왜 이렇게 아파트에 관심이 많냐고 물으니 본격적으로 갭투자를 시작할 거라 말한다.
몇 년 동안 공예를 취미로 시작해 또 다른 꿈까지 키웠던 그녀였다. 아파트 말고 공예작업에 관해 물으니 아파트만 24시간 생각하고 분석해야 성공한다며 다른 곳에 신경 쓸 수 없단다. 그 말 뒤에 친구는 아파트 갭투자로 많은 돈을 벌어 평생 봉사하고 살 거라 야무지게 덧붙인다.
우리는 아파트가 연봉을 벌어주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