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인류의 삶과 시대를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로 양분하며 세상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시간을 돌이킬 수 없듯 이제 우리의 삶이 완전히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할 듯하다. 하지만 인간 경험의 총체인 역사의 힘이란 과거를 통찰해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왜 이런 세상이 펼쳐졌는지 뼈아프게 돌아봐야 한다. 이런 성찰과 반성이야말로 코로나가 우리에게 준 기회이자 희망일 것이다.
먼저, 코로나가 왜 인간에게 왔는지부터 물을 수밖에 없다.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박쥐의 몸속에 살던 바이러스를 불러온 것은 인간이고 인간의 탐욕이었다. 자본의 무한증식이라는 정언명령은 난개발로 자연을 파괴하고 동식물의 서식지를 침범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게 코로나는 불청객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극구 맞아들인 손님이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발전론이 현 파국의 출발이었던 것이다. 정부와 언론이 입에 달고 사는 경제 성장(률)을 떠받치는 개발과 발전은 지구의 생명에는 항상 치명적인 것임이 코로나로 인해 역설적으로 드러났다. 성장이 멈추니 자연이 살아나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개발과 어깨동무하는 발전은 결국은 파괴의 다른 이름이고 망가지는 것은 우리의 삶터인 지구다.
오늘날 자연의 고통은 이제 인간의 더 큰 고난으로 돌아오고 있다. 파괴된 자연이 인간에게 보낸 코로나19라는 선물은 이미 인간의 숨통마저 조이고 있기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다른 길'을 선택하라고 코로나 시대가 우리를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지금의 코로나 위기는 더 큰 파국의 일부일 뿐이다.
지구온난화라는 느긋한 표현을 밀어내고 있는 기후'위기'라는 용어는 지구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구의 허파를 태워나가는 산불과 긴 장마와 각종 이상기후는 지구가 내지르는 마지막 절규이자 경고에 다름없다. 이제 지구라는 이름의 자연을 구하는 것이 인간을 구하는 일이 되었다. 코로나19 시대가 인간에게 주는 절박한 교훈은 바로 그것이다.
일상으로 돌아와 보자. 지금이 누구에게나 유례없는 상황임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하나같이 마스크를 꾹 눌러쓰고 수많은 너와 나 사이에는 늘 거리가 요구된다. 개인의 마스크는 우리 모두의 '산소호흡기'에 다름 아니고, 필사적으로 확보한 거리가 너와 나의 '보호구역'이다.
사실 영화 속 이야기라고 해도 딱 맞는다. SF 재난 영화의 한 장면으로 썼다면 더 좋았을 모습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살풍경이다. 미래 인류가 오염된 공기로 마스크를 쓴다는 상상은 흔한 일이었는데, 바이러스 전염으로 인한 '마스크 군중'의 획일화는 새로운 차원의 구현이다.
그나마 우리는 좀 낫다는 말도 있다. 베를린에 사는 친구가 '독일은 여전히 봉쇄 중'이라며 한국 상황이 부럽다고 안부를 전한다. 유럽도 미국도 세계는 지금 코로나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미국 주간지 <타임>은 지난 2월 23일자에서 코로나 후 1년을 돌아보며 '한국은 코로나 대응에서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를 최소화하며 선진 산업 민주국가들 중 두각을 나타냈다'고 높게 평가한다. 우리가 '선진 산업 민주국가'에 속한다니 나쁘진 않지만 규모만 다를 뿐 고통의 경험과 위기의식, 그로 인한 거리두기 상황은 여기서도 별반 차이가 없다.
K-방역의 성공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아시아 유교문화의 전통 속에서 순종적인 성향이나 개인보다는 집단을 앞세우는 태도와 결부된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에서 서구중심주의에 뿌리를 둔 오리엔탈리즘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이웃과 공동체를 위하는 우리의 전통이 깊기도 하며 자발적이고 협조적인 시민의식이 낳은 성과이기도 한 탓이다. 그래서 이 유례없는 팬데믹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개인의 인권이나 자유와 상생하는 공동체의 필요성과 가치를 새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흐르는 듯하다. 코로나19 시대의 상식적인 미덕은 사람을 참고, 사람 사이의 거리를 견디고, 흩어짐을 인내하는 것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 '모이면 죽는다'는 신념을 철두철미 고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우리는 모두 분리를 지향한다. 각자 최대한 분리하는 행동과 삶이 절실히 요청된다. 나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너를,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다. 그래서 '지금 혼자가 되지 않으면 영영 혼자가 될 수도 있다'는 협박 같은 홍보가 우리 시대의 쓸쓸한 자화상이다.
작금의 풍속도를 감안하면 이중적으로 읽히는 협박이다. 영영 고립되지 않으려면 지금 고립을 찾으라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 전염이나 그로 인한 고립이 무섭기도 하지만 코로나가 일종의 낙인이기 때문이다. 확진자뿐 아니라 완치된 사람들이 느끼는 시선에서 드러나듯, 그 낙인은 고립을 강제하는 주홍글씨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금 시대의 개인은 치명적 바이러스를 전달하는 숙주가 되었다. 개인도 몸도 온기가 아니라 위험을 내포한 두려움의 존재가 되었다. 대중 공간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을 겨냥한 분노와 혐오의 원인은 그러한 두려움이다. 게다가 코로나 시대 지구촌 곳곳에서 약자들의 신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가난한 계층이 제일 먼저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고, 소수자들이 가장 먼저 혐오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그렇게 세상은 신종 '혐오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있다.
이처럼 코로나라는 위기에 맞닥뜨리며 공동체는 안과 밖에서 되려 흔들리고 있다. 실제로 지구상의 여러 공동체가 시험대에 올랐고 선진국이라 불리던 나라들이 더 허점을 드러냈다. 결과는 어찌 보면 놀랍고 어쩌면 당연했다. 미국식 공동체가 가장 큰 타격을 입었는데, 원래 약자를 돌보지 못하는 시스템이고 공공의료가 계층과 계급의 문턱 앞에서 멈추기 때문이다. 물론 강자가 곤욕과 치욕을 당한 경우도 있다.
공동체의 분열을 조장하던 트럼프가 먼저 코로나에 무릎을 꿇고, 최대한 버텨봤지만 대선에서도 결국 패하며 체면을 구겼다. 그렇지만 트럼프가 씨앗뿌리기를 마다하지 않은 분열이 미국에서 다시금 공동체 내 폭발적인 갈등으로 비화되고 있다. 지난해 5월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대변되는 흑인에 대한 공권력의 차별과 폭력이 지구촌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이제는 코로나 여파로 아시아인을 겨냥한 혐오가 물리적 위협과 공격으로 증폭되는 양상이다.
물론 공동체의 갈등이란 언제나 있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는 혐오에 기반한 공동체의 분열이 얼마나 파국적인 결과를 낳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유대인 혐오가 대표적이고 그 참혹한 귀결은 나치의 역사가 완성했다. 그 대학살의 전환점은 슬프게도 '수정의 밤'이라는 낭만적 이름이 붙은 유대인 가게와 시나고그 공격이었다. 수없이 부서진 창문의 하얀 유리조각의 바다가 불러낸 언어도단의 이름이었다. 인종혐오에 집단폭력이 더해진 '참혹한 밤'이라 불렀어야 마땅하다. 지금 역사가들은 '포그롬'(Pogrom), 즉 '대(大) 박해'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나치는 결국 유럽대륙이라는 공동체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재앙과 파국을 선사했다. 하지만 나치의 유대인 혐오는 그 공동체 내에 이미 공기처럼 폭넓게 상존하던 현상이었다. 히틀러와 나치는 그 혐오를 독일에서 정치적 민족적으로 이용해 극한으로 밀고 나간 것이었다. 아리안족의 '위대한' 공동체를 구현한다는 미명으로 말이다.
그러니 알아야 한다. 자기 공동체를 절대시하는 결과는 다른 공동체를 적대시하는 일임을. 공동체 내 약자를 혐오하는 일이 공동체의 근간을 파괴하는 일임을. 각각의 공동체를 인정하고 공동체 내 소수자를 보호하는 일이 결국 인간 전체를 지키는 일임을.
코로나로 인해 공동체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은 어디서나 사회적 약자들이다. 인종과 젠더, 신체 등의 약자와 소수자는 더 힘겹게 이 시간을 버티고 있다. 특히나 살얼음판을 건너가고 있는 실직자와 비정규직을 비롯해 경제적 약자들이 더 가혹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부자들은 더 부유해졌고, 가난한 사람들은 목숨을 비롯해 더 많은 것을 잃었다.
불평등이 권력의 문제이듯, 코로나도 결국 권력과 연결된 문제다. 코로나로 부자들의 주머니가 더 채워졌다면, 세금으로 약자들의 상황을 치유해야 한다. 경제는 급속히 성장했지만 불평등이 낮았던 1950년대 미국의 최고 소득세율은 90%가 넘었고 한국도 1970년대에는 최고 70%까지 높아졌다. 문재인 정부 때 인상한 것이 지금의 45% 수준이다.
부자증세는 코로나 시대에 더 심화된 불평등을 바로 잡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불평등의 심화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시발점인 탓이다. 놀랍게도 미 바이든 정부가 부자 증세라는 칼을 빼든 것도 침몰하는 공동체를 구하기 위한 자구책인 셈이다.
그래도 인류가 작금의 상황에서 절치부심 배운다면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은 판도라의 상자에 남아있다. 그리고 그 희망의 끈을 끝끝내 놓지 않는 이들은 언제나 존재해 왔다. 가령, 이름만 달리한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폭력에 맞서 미국 내에서부터 분노와 항의 시위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다.
그런 대중의 목소리에서 우리는 희망을 본다. 약자와 소수자를 겨냥한 공격에 분노하는 그 연대의 목소리가 공동체를 떠받치는 기둥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무릇 함께함, 더불어 삶이었다. 공동체와 함께, 공동체 속에서만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이제 이 '인간 공동체'는 자연을 포함한 '지구 공동체'로 전환되어야 한다. 코로나시대의 위기는 자연으로부터 와서 인간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의 복수나 반작용'에서 코로나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 발화점은 인간이었다. 인간이 쏜 자연 파괴의 화살이 인간들 사이의 혐오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온 탓이다.
그래서 소수자의 인권을 지키는 것이 자연을 지키는 일과 무관하지 않으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길이 곧 우리 인간이 사는 길임을 깨달아야 할 때이다. 이것이 바로 코로나가 우리에게 준 가장 뼈아픈 가르침이다. 결국 자연과 공동체를 지키는 일이 우리의 미래를 지키는 일임을!
세계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는 방탄소년단(BTS)이 노래했듯 '라이프 고즈 온'(Life Goes On)은 어떤 상황에서도 불변이다. 괴로워도 슬퍼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좋아하는 록 그룹 포스터가 있다. 공연 중 보컬과 기타가 등을 주고 서로 맞대어 쓰러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순간을 담아냈다. 한자 사람인(人)의 모양새와 같다. 한 팀은 그런 것이다. 내가 너의 등받이가 되어주며 버티는 것. 공동체도 그렇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소식지 <민주공원>에도 송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