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도 뜨거운데 남원은 '춘향영정 문제'로 나날이 더 뜨겁다. 1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는 춘향영정 봉안 문제는 잘 모르는 시민들에게는 한심하고 짜증나는 일이다. 최근 <연합뉴스>(7.22) 기사(친일 작가가 그린 남원 광한루원 '춘향 영정' 교체 왜 늦어지나)에 달린 댓글만 봐도 '소설 속의 인물인데 무슨 영정이냐? 춘향이한테 제사도 지내냐?' 하는 볼멘 소리가 끝도 없다.
춘향제는 1931년에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 축제다. 일제강점기 남원 예기권번의 수기생이었던 최봉선의 제안으로 춘향 사당을 만들고 영정을 봉안한 뒤 제향을 올린 게 춘향제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최봉선과 전국의 예기권번 기생들, 그리고 남원의 뜻있는 인사들은 왜 춘향제를 시작했을까? 당시 권번의 기생들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창기가 아니라 사라져가는 전통예술의 맥을 잇는 예술인들이었다. 그런 기생들이 춘향의 제사를 지낸 이유를 알면 영정 문제를 결코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할 수 없다.
춘향제는 남원 사람들만의 행사가 아니었다. 전국의 예기권번에서 성금을 냈고 100여명의 대표 기생들이 참여해 제향을 올리고 광한루에서 판소리 명창 대회를 했으니 가히 전국구 행사였다. 구경꾼들도 전국에서 수만 명 씩 몰렸다.
춘향사당을 짓는 운동은 1929년부터 시작되었다. 1929년은 만세운동 10주년이 되는 해였고 전국의 신간회와 청년동맹, 형평사 같은 항일운동 단체에서 제2의 만세운동같은 대규모 시국대회를 준비했다가 발각이 되어 조직이 와해되기 시작한 해다. 11월에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검거되자 신간회가 다시 일어서고자 했으나 탄압을 받아 결국 국내 독립운동은 거의 힘을 잃게 되었다.
'남원항일운동사'에 의하면 당시 남원에도 항일운동 단체로 신간회와 청년회, 형평사가 있었다. 1929년 2월 신간회 부지회장 겸 총무로 뽑힌 이현순, 그리고 청년회 회장이었던 정광옥, 이 두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최봉선과 함께 춘향사당 건립운동의 핵심 인사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 전북 권번을 연구한 논문에 의하면 전북에서 유일하게 남원권번에서는 돈줄이었던 일본사람들을 상대하기 위한 필수 요건이었던 일본말을 안 가르쳤다고 한다. 최봉선은 인물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명창으로도 유명했으며 구례 수재민 돕기 공연을 펼치기도 한 매우 비범한 기생이었다.
최봉선은 29세에 기생을 그만두고 부산관이라는 유명한 요릿집을 운영하면서도 사당 할매로 불릴만큼 영정과 사당을 지키는데 헌신했고 6.25전쟁 때는 영정을 머리에 이고 피난을 가서 영정을 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 재산을 제수답으로 기증해 춘향제가 지속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역사가 있기에 춘향선양회에서 발행한 '춘향제 60년사'에서는 춘향제의 시작을 '일제 하에 잠든 민족혼을 깨우쳐 주면서 춘향정절의 숭고한 정신을 우리 민족 모두의 가슴 속에 뿌리내려 춘향전의 문예적 가치를 만방에 빛낼 목적으로 발상하였다'고 정리했다. 그리고 남원시민들은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91년 동안 춘향제를 지내왔다.
그런데 춘향영정에는 우역곡절이 많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조선식산은행장 하야시 시게조가 내선일체의 방편으로 당시 가장 인기 아이템이었던 춘향을 악용한 것이다. 당시 조선 고위층 부인들이 조선 총독에게 전쟁 승리를 위해 쓰라며 패물과 돈을 바치는 '봉차금납도'라는 그림을 그린 당시 최고의 화가 김은호에게 춘향 영정을 새로 그리게 했다. 그 때 그림값을 낸 사람은 호남은행장 현준호였다. 김은호와 현준호는 반민족친일인명사전에 나오는 우리나라 대표 친일파다.
그 때 김은호가 그린 춘향이는 일본과 식민지 치하 조선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던 일본 전통극 가부키 형식의 춘향전에 등장하는 얼굴 하얀 춘향이었다. 그리고 그 춘향이를 16세 아가씨로 그렸다. 본래 영정은 어사부인이 된 30대 쪽진 머리를 한 춘향이였는데 말이다.
일제는 봉안식이 아니라 일본의 신사에서 하는 '입혼식'을 한 뒤 본래 있던 영정 위에 일본 춘향이를 덧세우게 했다. 내선일체를 상징하는 이중 봉안이었다. 그런 치욕을 견디며 해방을 맞았건만 친일파 청산이 안 됐듯이 김은호가 그린 영정도 치워지지 않았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누군가 김은호가 그린 영정을 칼로 찢어 버렸다. 일제의 국민정신총동원 전남 이사장이었던 현준호도 광주에서 피살되었다. 그렇게 끝났어야 했다. 그렇게 끝났다면 오늘의 영정 싸움도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1961년, 6.25때 훼손되어 없어진 영정과 똑같은 영정이 다시 춘향사당에 쳐들어 오는 일이 벌어졌다. 박정희 정권의 내각수반이었던 송요찬이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이쁜 춘향이로 대치하라(1965.5.11 조선일보)'는 명령과 함께 원래 영정을 내쫓고 김은호가 새로 그린 춘향이를 다시 올린 것이다. 그 춘향이는 예전에 없어진 것과 거의 똑같은 왜색 춘향이 그림이었다.
2021년 올해는 최초 영정이 쫓겨난 지 60년이 되는 해다. 1965년 조선일보에서 최봉선은 '관에 밀려난 고전 춘향의 초상화를 반드시 돌려 놓겠다고 관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1966년 신문 기사를 마지막으로 최봉선이라는 이름조차도 남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그렇게 잊혀진 이름 최봉선과 최초 영정의 존재는 작년 친일화가 김은호의 그림을 내린 뒤 다시 떠올랐다. 영정이 남원 향토박물관 수장고에 걸려있었던 것이다. 남원시는 당연히 그 영정을 본래 자리로 돌려놓으려 했다. 그러나 일부 시의원들이 좀 더 많은 시민들의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며 봉안을 막았고 거의 1년 가까이 시민들의 뜨거운 원성을 무시한 채 봉안을 미루고 있다.
미루는 것뿐만 아니라 작년 12월부터 '춘향영정 제작(선정) 기본계획 용역' 설문조사(최초 영정 봉안이 우세하게 나왔으나 발표하지 않음)와 연구용역을 실시했다.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 그리기로 작정한 것이었기에 연구용역 결과는 그런 결과가 나왔다. 미술사 관련 전공자들로만 구성된 연구자들이 연구한 것이었는데 그들은 보고서만 내놓고 지금까지 발표의 의무를 수행하지도 않고 있다.
그러면서 남원시는 최근 연말 안에 제3의 작품을 공모할 계획이라고 언론(7월22일 연합뉴스)을 통해 밝혔다. 그 이유는 최초 영정의 작가가 정확하지 않고(강수주 화백 낙관이 없고) 소설 속 춘향이는 16세인데 반해 영정 속 인물은 30대 어사부인이고 복식이 조선시대가 아닌 1920년대라는 이유다. 시가 이렇게까지 영정을 새로 그리려는 진짜 이유가 뭔지 시민들은 몹시 궁금하다. 최초 영정은 안 된다면서 시에서 말한 세 가지 이유에 대한 답은 내가 알려주겠다.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에 민족혼을 되살리기 위해 그린 영정에 누가 낙관을 찍을 수 있겠는가? 본래 영정에는 낙관을 안 찍는 경우가 많으며 조선 후기에 그려진 김수로왕의 영정도 작가를 알지 못한다. 그래도 잘 봉안되어 있다.
복식과 나이가 안 맞는다고 했다. 최초 영정은 소설 속 예쁜 춘향이를 그린 게 아니다. 모진 고난을 이기고 신분을 뛰어넘어 사랑을 쟁취한 열녀를 그린 것이다. 그 항거정신과 한 남자를 향한 정절을 우리 민족을 향한 것으로 바꿔서 영정을 그렸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복식과 열녀로서 완성된 30대 어사부인을 그린 것이다. 열여섯살 예쁘기만한 어린 춘향이에게 뭐하러 제사를 지내겠는가? 이런 역사성을 이해한다면 저런 이유를 댈 수가 없다.
대한민국 최초의 지역축제인 춘향제의 위상은 최초 영정을 제자리에 돌려 놓을 때 비로소 제대로 정립될 수 있다.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에 악용된 춘향제가 아니라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민족운동의 하나로서 말이다. 그렇기에 이 싸움은 뒤틀린 역사를 바로 잡는 매우 가치있는 일이고 굵은 땀방울이 아깝지 않은 뜻깊은 일이다. 1931년작 최초 춘향영정은 미술 작품이 아니고 영정이며, 박물관이 아니라 반드시 사당에 봉안되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남원작은변화포럼 대표이자 역사동화작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