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우리 사회에는 크게 세 개의 젠더 소통장(각 장(field)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물론 의문입니다만)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회 공론장에서의 젠더 논의,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젠더 이야기 그리고 일상적 젠더 경험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셋 사이의 간극과 괴리가 상당한 것으로 관찰됩니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근본적 문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선 소위 사회 공론장에서의 젠더 논의를 잠시 살펴보지요. 정부, 국회, 언론, 시민단체 등을 통해 말해지는 내용들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을 텐데 보통 '이상적이고 당위적인' 내용이 말해지는 소통장입니다. 그런데 뭔가 빈 깡통소리 같습니다. 말의 무게가 실리지 않습니다. 말뿐일 말로 보이기 때문이지요. 국민도 눈이 있으니까요. 보이니까요.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그 반대의 지점에 온라인 소통장이 있지요. 물론 온라인에서의 젠더 소통이 단일대오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만, 사회 공론장에서 말해지는 것들과는 반대의 극단적인 입장인 주장들이 큰 힘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에 반대하는 입장에 선 이들의 목소리도 날이 바짝 서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상적 젠더 경험의 장이 있습니다. 이 장에서의 젠더 소통은 상대적으로 수평적이고 개방적이어야 할 것 같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합니다. 경험과 의견이 자유롭고 편안하게 공유된다기보다는, 일방적인 주장 또는 침묵이 지배적이지 않나 싶을 정도입니다. 소통의 양으로 봐도 사회 공론장, 인터넷 소통장에 비해 상당히 작아 보입니다.
이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하나의 예를 생각해볼까요? '대한민국 20대 남성 25%는 더 이상 여성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2019년 시사지 <시사인> 조사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어느 당 소속이든 관계없이 장관, 국회의원 등 고위 관직에 있는 분들이 이 결과에 공감하는 발언을 공식석상에서 할 수 있을 것 같으신가요? 그리고 만약 그런 발언을 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상당한 논란이 일어날 것이고 아마 직을 내려놓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짐작합니다.
속으로야 그렇게 생각하는 고위공직자들이 왜 없겠습니까마는(있다는데, 아니 꽤 많을 것이라는데 한 표 걸겠습니다), 적어도 공론장에서 공식적으로 그런 발언을 하지는 못할 겁니다. 사회적 파장과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가 두려워서라도요. 그 정도는 우리 사회가 '변화'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너무나 다르게 온라인에서 젠더 논의를 주도하는 일정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대한민국에 더 이상 여성차별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남성차별이 존재하며 이제는 그것이 문제라는 주장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겁니다. 그리고 이런 입장의 사람들과 그 주장을 절대 수용할 수 없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과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만이 온라인에서는 크게 부각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온갖 적대적, 모욕적 언어들이 넘쳐납니다. 가히 '온라인 젠더전쟁'이라 할 만하지요.
많은 젊은이들이 젠더 이슈를 접하는 주된 통로가 온라인이라는 것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젠더, 페미니즘하면 자동으로 연상되는 단어 중 하나가 갈등,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특정 입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서로에게 화가 나있고, 그 중간쯤 어딘가 서 있는 사람들은 뭔가 끼고 싶지 않다, 괜히 골치만 아파질 것 같다는 마음에 무관심을 선택하는 경향도 증가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사이에 낀 우리 일상의 젠더 논의는 참으로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매일매일 '젠더적 일상'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가족, 친구, 애인, 동료, 지인들과 젠더 이야기를 '일상적 화제'로 삼아 생산적인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많이 어려운 일로 보입니다. 젠더와 페미니즘 이야기는 종교나 정치 이야기처럼 삼가야 할 어떤 것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이야기해봤자 서로 불편하지 않을까 막연하게 짐작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그것을 굳이 확인하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싶지는 않겠지요?
그러니까 온라인에서는 지긋지긋한 '젠더싸움'을 경험하는 와중에 사회 공론장에서 반복해서 읊어지는 지당하고 마땅한 이야기들을 건성 흘려들으며, 실제 일상에서는 젠더에 대해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그런 상황에 처한 학생들이 내 수업시간에 앉아 있는 겁니다. 젠더 이야기는 피할 수 없는, 삶의 매우 중요한 한 부분이지만 우리 젊은이들은 그에 대한 건강한 생각을 스스로의 말과 글로 발전시켜 나갈 기회를, 동료들과 햇볕 아래서 그에 대한 진지한 의견을 나눌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 채 성인이 되어 버린 겁니다.
젠더 담론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일, 우리가 놓여 있는 사회적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