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정치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는 불문율이 있다. 그 이유는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에 의해 편가르기가 되어 싸움이 나고 감정도 상하기 때문이란 데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치야말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이며, 온 가족이 모였을 때 취직이나 결혼 등의 주제보다 훨씬 생산적인 이야깃거리라고 생각한다.
양한 지역에 사는 다양한 세대, 아마도 다양한 직업군의 평범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는 서로의 생각을 듣고 나의 사고를 확장해나가기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감염병의 여파로 이번 명절에도 큰 모임을 갖기는 힘들었지만, 작게나마 모이면 공통적인 관심사로서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소재로는 정치만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정치 이야기가 쓸 데 없이 싸움으로 번지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사람들이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를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 이야기 할 때에 더욱 그렇다. 정치는 좁은 의미로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넓은 의미로는 국가 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에서 갈등이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칭하기도 한다. 특히 많은 갈등 상황에서 가치에 대한 공정한 배분이 정치의 주요 쟁점이 되곤 하는데, 이 방법론에 대한 깊은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는다.
이보다는 많은 사람이 자연스레 얼마 남지 않은 대통령 선거에 대해 이야기하고, 누군가 어떠어떠한 연유로 어떤 후보가 우세하다 말하면 다른 누군가는 여론이 그렇지 않은 근거를 내세우며 반대 의견을 제시한 뒤 본인이 지지하는 후보가 승리할 것임을 주장한다. 이러한 모습은 흡사 한 쪽으로 편향된 여론조사분석가 같다. 아니면 운동 경기에서 어떤 팀이 이길지 베팅하는 장면 같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단순한 다툼과 감정싸움으로부터 벗어나질 못한다.
경마식 보도 말고... 후보들의 비전이 보고 싶다
자주 듣는 팟캐스트에서 소위 '정치 분야 전문가'로 칭해지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수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여론이 이쪽으로 가고있으니 이는 이 후보에게 유리하다는 둥, 이 당에서는 저 당의 어떤 후보를 더 좋아한다는 둥 게임 해설하듯 신나게 '썰을 풀며' 여러 가지 프레임 씌우기에 바쁜 이들이 상당하다. 물론 이러한 콘텐츠도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다음 대통령 선거까지 많은 날들이 남아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렇게 관전하는 듯한 모습은 꽤나 아쉽다.
2010년 전후였던가, '생활정치'라는 용어가 마치 유행처럼 많이 언급됐었다. 이 용어 또한 '정치' 만큼이나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지만,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이 생활 속에서 해나가는 실천이라 하면 무난할 듯하다. 지구의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커피를 한 잔 사더라도 텀블러를 가져가서 받아오는 행동은 물론 생활정치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층위에서 거론되는 정치라는 용어가 많은 이들에게는 생소한가보다. 사회학과 대학원 시절에 나는 잠깐 공장식 축산 시스템에 거부감을 느끼고 채식을 했던 적이 있다. 많은 동기 및 선후배들은 내가 정치적인 이유로 채식을 한다고 얘기하면 잘 이해해줬지만, 졸업 후 세상에 나와서 왜 채식을 하냐는 질문에 "정치적인 이유"라고 설명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정치를 하냐, 어디 당원이냐는 질문을 해왔다. 딱 한 번 "승진과 관계있냐"는 농담이 돌아왔다. 상호 간 편리하고 행복한 소통을 위해, 이제 나는 '정치적인 이유'란 표현은 가급적 쓰지 않는다.
어쨌든 그 딱 한 번 들었던 농담 섞인 질문이 뜻한 바는 내가 다니던 직장 내 정치, 사내 정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생활정치는 어색해해도 직장 내 정치와는 친숙한 것 같다. 이미 많은 직장인은 대표가 어떤 임원을 더 총애하는지, 차기 권력은 어디로 갈 것인지를 그들끼리의 회식 자리에서 토론하고 분석하며 어디에 '줄을 댈지' 결정한다.
사내정치의 맥락에서 정치가 가지는 의미는 갈등의 해결이나 가치의 공정한 배분 측면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이를 진두지휘하는 권력에 누가 가까이 다가가느냐의 측면에서 구사된다. 다시 말해 "저 사람 참 (사내) 정치를 잘한다"고 말하면 이 사람이 갈등을 잘 중재하고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데 소질이 있는 사람임을 의미하기보다 '줄을 타고' 힘 있는 자리로 잘 올라간다는 뜻을 가질 때가 많다. 정치인 또한 당연히 사내 정치와 같은 정치를 한다. 사라지지 않는 계파 정치도 그 이유일 것이다.
평범한 시민인 나는 정치인의 직장 내 정치에는 전혀 흥미가 가지 않는다. 물론 누가 권력을 쥐느냐에 따라 갈등의 해결이나 가치의 배분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는 부분도 고려해야겠지만, 지금 우리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그들이 권력을 쥐는 과정에 지나치게 치중되어 있다는 부분이 불만이다.
당내 무슨 이슈가 터졌을 때나 유력 후보끼리 말다툼을 할 때 그 갈등 구조를 보도하는 수많은 기사가 좀 재밌는 건 어쩔 수 없긴 하다. 그런데 국민의 입장에서는 누가 권력을 잡을 경우 어떠한 국정 철학을 바탕으로 나라를 이끌어갈지에 대한 관심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미디어에서도 이에 대한 분석을 더 자주 해줬으면 한다.
특히 각 후보가 이슈별로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공약을 내세우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엄숙하게, 활자 그대로만 다뤄질 뿐 이에 대해 파고드는 전문가 의견을 찾아보기가 정말 힘들다. 예를 들어 환경과 에너지 문제에는 각 후보가 어떤 생각과 비전과 방법론을 가졌는지, 젠더 문제나 저출생 문제에 대한 의견은 또 어떠한지, 부동산 가격 및 가계부채 해결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들어본 뒤 분야별로 전문가 집단은 후속적으로 반론을 제기하고, 또 그에 대한 답을 근거와 함께 듣는 역동적인 소통을 보고싶다.
이런 성격의 보도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면, 명절에 모여서 어떤 당이나 후보가 좋고 나쁘다며 단순하게 감정 싸움만 하다 얼굴 붉히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