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봄, 모친이 갑자기 연락 두절되었다. 사방으로 가실만한 곳을 찾아 수소문해 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모친. 걸어서 한 시간 거리 천변에서 캔 봄나물 한 줌을 검은 봉지에 꽉 쥐고 간신히 걸어오신 것이다.
그날 이후 모친은 나를 '아빠'라 부른다. 꽃 피고 설렘으로 가득할 4월이 우리에겐 잔인한 4월이었을까?
아빠라는 말은 전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많이 쓰인다고 한다. 아빠 엄마를 나타내는 단어에 m과 a 발음을 많이 쓰는 이유는 별거 없고, 그냥 인간이 최초로 쉽게 발음할 수 있는 자음과 모음이 각각 m과 a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아빠라는 말은 1970년대 가정이 핵가족화되면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고, 요즘은 아내들도 남편을 부를 때 아빠라 부르기도 한다.
뇌경색으로 왼쪽 손과 발이 마비된 모친은 스스로는 거동조차 할 수 없다. 연이어 혈관성 치매까지 겹쳐 인지 능력은 아이 수준이 되었고 치매가 악화되면서 아들인 나를 아빠라 불렀다. 손주 이름을 빼고 아빠라 부르나 보다 생각했는데, 치매로 혀가 굳어지고 발음이 잘 안 되면서 쉽게 부를 수 있는 호칭으로 아빠라 부르게 된 것 같다.
아내가 '애비야', '아범아', 혹은 '아들아'라고 부르라 해도 금방 다시 아빠라 불렀다. 가족들끼리는 이해하지만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민망하기도 하다. 모친 모시고 진료 갔을 때 이를 본 의사가 아들을 아빠라 부른다고 심한 말로 탓한 적도 있었다. 치매가 아이 마음으로 회귀시킨다 하니 아마도 보호와 애정을 갈구하는 마음이 아빠라는 호칭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아빠'라는 말이 가져다주는 감정
결혼하고 첫아이 얻었을 때 한 친척분이 "이제 아빠가 되셨네요"라고 했을 때, 마치 감전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아빠라는 말은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더불어 책임감을 주는 말로 내게 들어왔었다.
서울대 박희병 교수는 모친과 남긴 대화를 기록한 책 <엄마의 마지막 말들>에서 모친과 나눈 대화 중 마지막으로 남긴 '어어어'라는 대답을, "그래, 희병아. 잘 있어라. 그리고 건강하게 공부 잘해라. 그동안 고맙다. 나도 네 덕에 좋았다"라는 메시지로 들었다고 했다.
83세 모친이 나를 아빠라 부를 때 그 안에 많은 마음이 담겨있다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우리집은 엄한 부친 아래 감정 표현이 인색한 조용한 가정이었다. 마음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겉으로는 좋아한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는 애정 표현 말을 거의 들어 보거나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치매 걸리신 모친으로부터 매일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있다. 흔히 말하는 착한 치매이다. 몇 마디 잘하지 못하지만 우리 가족 식구들 볼 때마다 보고 싶었다, 고맙다, 사랑한다, 잘 생겼다, 좋다고 말씀해 주신다. 아마도 이전에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에만 담아둔 말을 치매를 통해 마음껏 해주시는 것 같다.
모친 뇌경색과 치매 판정이 났을 때 경험 있는 지인분이 큰일났다고 했었다. 재활병원에 입원 치료하거나 전 가족이 비상체제로 잘 대응해야 한다 했다. 아내와 아들 둘, 딸 하나 그리고 여동생까지 여섯 식구가 시간표를 짜서 돌아가며 모친을 잘 모시려 애쓰고 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주간보호 센터가 있어 아침에 휠체어로 모셔다드리면 낮 시간 그곳에서 돌봄을 받는다.
의학의 발달로 수명이 길어지고 노령인구가 많아지면서 각 가정마다 노인성 질환으로 고생하는 부모님 모시는 일이 사회문제로까지 번지게 되는 때이다. 성경은 "부모를 잘 공경하면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린다"라고 한다. 모친을 모시며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도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이 축복의 시간일 수 있다 생각한다. 먼 훗날 후회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가족들이 모친을 교대로 돌보면서 가족 간의 배려와 친밀함도 더 좋아졌다. 얼마나 더 모실 수 있을지. 가족들이 계속 감당할 수 있을지 앞일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 가정은 아직은 나쁜 큰일이 아니라 좋은 큰일이 진행 중이다.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모친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처럼 사랑하라는 신의 계시로 생각하고 오늘도 아빠라 부르면 기쁘게 대답하며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