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 늘어선 야자나무, 현무암 돌담길, 갖가지 귤밭… 육지와는 다른 풍경에 묘한 기분이 든다. 멀리 보이는 한라산은 우뚝 솟은 산이라기보다 든든하게 지켜봐 주는 여신 같달까. 4월이 되면 이곳 제주에도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온다. 8년 전 그때도 수학여행을 오는 고등학생들을 태운 배가 인천을 거쳐 제주를 향해 오고 있었다. 그 배는 끝내 제주항에 닿지 못했다.
지난 3월 초, 세월호 참사 8주기를 맞아 '파란 바지 의인'이라 불리던 김동수씨와 아내 김형숙씨를 만났다. 두 분이 함께 일하고 있는 제주시 사려니숲길 탐방안내소를 찾았다. 조그만 안내소에는 탁자 하나와 간이침대가 있고 그사이에 커튼이 벽 역할을 하고 있다.
잊으라고 하지 마세요
김동수씨는 8년 전까지만 해도 화물차 기사였다. 제주와 육지를 오가며 짐을 운반해 주는 일을 했다. 그날도 의뢰받은 짐을 화물차에 싣고, 몇몇 화물 기사들과 함께 제주로 오던 길이었다.
고교 시절 육상선수였고 잠깐 코치 생활도 했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랐으니 수영도 잘했다. 어려서도 바다에 빠진 학생들을 구조하곤 했다. 세월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구조 과정에서 지치고 손에 마비가 올 정도였다.
더구나 가라앉는 세월호 창 너머로 구조를 기다리는 학생들 얼굴은 그에게 극심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남은 사람들을 구조할 줄 알았던 해경은 구조할 생각도 의지도 없어 보였다. 국가기관에 대한 불신 또한 컸다.
다 구하지 못한 데서 오는 죄책감과 국가기관에 대한 불신, 생존한 피해자이지만 그저 '파란 바지 의인'으로만 기억하지 피해자 김동수로는 바라봐 주지 않은 데서 오는 소외감 등으로 온전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김동수씨뿐만 아니라 제주에 사는 세월호 생존자들은 남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약으로 고통과 상처를 누르고자 한다. 여전히 정신과 약을 먹으며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이겨 내려고 한다. 몇 시간이나마 잠들기 위해 많은 수면제를 먹어야 한다. 동시에 생계를 위해 버거운 삶을 꾸역꾸역 살아야 하는 두 겹 세 겹의 짐을 진 채 살아간다.
화물 기사들은 사고가 나자마자 화물주들의 독촉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물건값을 어떻게 할 거냐, 물어내라 이런 얘기다. 생계 수단인 화물차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들에게 치료와 상담 등은 사치에 가까웠다. 당장 먹고살아야 했으니 말이다. 육지와 떨어진 제주 생존자들에게 치료나 상담을 지원하는 곳은 한참 뒤에야 생겼다. 각자 먹고사는 일에 바빠 모이기도 쉽지 않아 함께 목소리를 낼 기회도 없었다.
상담을 위해 찾아간 어떤 병원에서는 힘들어하는 김동수씨에게 '잊으라'고 했다. 트라우마가 온몸에 새겨진 기억이 잊으란다고 잊어질까 싶다. 인터넷 검색창에 '세월호 김동수'를 치면 '자해' 기사가 많이 나온다. 다섯 차례나 되었다. 살고 싶다는 몸부림이었다. '내 얘기 좀 들어 달라'는 울부짖음이었다. 하지만 알아주지 않았다.
2015년 3월과 12월, 2016년 4월에 김동수씨는 집에서 그리고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 자리에서, 제주도청에서 자해를 했다.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던 아내 김형숙씨는 일을 그만두고 남편을 돌봐야 했다. 당시 제주도에 세월호 생존자가 24명이나 살고 있는데도 이들을 치료하고 상담해 주는 기관이나 시설이 없었다. 상담과 치료가 집중되어 있는 안산으로 가야 했다. 그때가 2014년 가을이었다.
"자해하고 하니까 직장도 다 그만두고 남편을 안산에 데려가서 좀 살리고 와야 되겠다 싶었죠. 1년 동안 보상금 받은 걸로 다 까먹고, 큰애는 공부하고 작은애도 대학생이었으니까 수입은 1도 없고 지출만 있을 때잖아요. 시간이 지나니까 남편도 그렇게 호전되는 것 같지도 않고, 여기가 지상낙원도 아니고... 근데 제주도로 돌아가려면 먹고살 일이 없는 거예요."
다행히 제주도에서 사려니숲길 탐방안내소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김동수씨 혼자 일하기에는 불안하기도 하니 김형숙씨도 함께 일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파란 바지 의인으로 '의상자'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뒤로하고, 다른 얘기를 꺼내고 싶었다. 대화 도중 마라톤 얘기가 솔깃했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했어요
한때 김동수씨는 커서 염소를 키울 꿈을 안은 채 고등학교 축산과를 갔다. 그런데 달리기에서 몇 등 안에 들면 장학금을 준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 육상선수가 되었다. 이때가 1980년대 초였다. 바닷가 마을에서 나고 자란 김동수씨는 어려서부터 뛰노는 걸 좋아하고 수영이나 달리기를 잘했다. 바닷가에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낸 일도 많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했어요. 마라톤을 했는데 제가 결핵 앓은 걸 몰라 가지고 그냥 운동하다 보니까 안 좋아진 거예요. 폐 한 쪽이 지금 거의 못 쓰는데, 졸업하고 실업 육상팀으로 첫 직장을 들어갔는데, 못 쫓아가는 거예요. (결핵 때문에) 도저히 운동을 못 하겠어서 석 달 하다가 나왔죠."
달리기를 잘했나 보다고 했더니 아내 김형숙씨가 "동수씨가 잘 달리는데 가르치는 거를 잘해요" 한다. 또 한 번 솔깃했다. 더구나 달리기 얘기를 하는 김동수씨 눈빛이 달라졌다. 생기가 돌고 밝아졌다. 그는 방위로 군 생활을 하면서부터 예전 다니던 중학교 후배들 육상 코치로 6년간 일했다. 가르친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되니 자연스레 고교 육상부로 뽑히는 일도 많아졌다. 김형숙씨가 남편 김동수씨 자랑을 더 이어 갔다.
"20대 초였으니 나이 차도 별로 없을 거 아니에요. 지금도 그때 마라톤 했던 동생들이 무슨 일 있으면 먼저 달려오기도 하고. 그리고 우리 딸이 초등학교 때였어요. 학교에 전문 육상부가 있지도 않았죠. '이번 마라톤 대회 있는 거 거거 김 선생이 맡아 해부러' 했는데, 그 6학년 담임이 그때 (가르친) 후배인 거예요. 후배가 '형님 이번에 대회 나가야 될 건디 그냥 형님 좀 가르쳐 주면 안 됐수콰' 이래서 가르치는디, 우리 집이 어딘 줄 아니까 애들이 자꾸 집에 오는 거예요. 항상 애들이 억압적으로만 하다가 재밌게 가르치니까. 그러면서 여기 함덕초등학교가 처음으로 종합 우승을 한 거예요."
도대체 어떤 재주가 있어서 운동을 잘 가르치게 되었을까? 고교 시절 배운 것 말고는 없었을 텐데, 그 비밀이 궁금했다.
"혼자서 공부를 했어요. 빌 로저스라고 미국 마라톤선수가 있어요. 그 선수가 연습하는 방식이 자유로운 방식이에요. 산이나 오르막을 뛰는 힘든 운동을 즐기면서 하면 효과가 배가된다, 이런 거죠. 빌 로저스 자서전을 보는데, 그냥 살아온 얘기뿐만 아니라 연습한 방법 이런 것도 있었어요. 그 책을 사보면서 나만의 운동 방법을 터득한 거죠."
체육 교사가 생기면서 코치는 접어야 했지만 마라톤 동호회 활동은 꾸준하게 열심히 했다.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던 달리기를 이젠 안 한다. 안 한 지 벌써 1년이 됐다.
지기 싫어하는 성실의 아이콘
결혼하고 잠깐 서울살이를 하다 돌아와 형이 하는 활어 유통을 도왔다. 고기를 배달하는데 아무도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 고기가 뭔 고기인지 이런 거를 안 가르쳐 주는 거예요. 그럼 나가 다 알아서 해. 배달 간 횟집 장부 확인하면서 이게 뭔 고기인지, 단가는 얼마인지, 하나하나 나가 다 터득하게 된 거죠. 또 지기 싫으니까 고기마다 어느 정도 되면 몇 킬로그램인지 이런 것까지 눈대중으로 다 익히고. 또 횟집에 다니니까 고기도 뜰 줄 알아야 해요. 근데 주방장이 안 가르쳐 줘요. 그래서 죽은 고기 있으면 집에 와서 밤에 혼자 연습했어요."
남편 얘기를 듣자 김형숙씨가 '동수씨는 집요하면서도 성실한 사람'이라며 거들었다. 남에게 어설퍼 보이거나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 때문이었을 테다. 지금까지 그는 육상, 택시 운전, 싱크대 자재 납품, 활어 유통, 횟집, 화물차 기사를 하며 제대로 잘하기 위해 집요하게 열심히 성실히 일했다. 적극적이었다. 그만큼 삶에 자신감이 있었던 듯하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활어차를 운전하다 돈을 빌려 횟집을 시작했다. 장사가 안 되지는 않았지만, 생활이 어려운 후배들이 있으면 써버리기도 하고, 물건값을 제대로 못 받은 경우도 있었다. 그랬으니 손에 남은 게 없다시피 했다.
횟집을 하면서 네 식구가 가게 한쪽 다락방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담배 냄새, 생선 비린내 등 초등학생 두 딸에게는 정말 힘들었을 시절이었겠다. 그래서인지 두 딸은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때 당시를 짐작케 하는 김형숙씨 글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죽은 생선 하나도 손질 못 했던 내가 팔딱팔딱 뛰는 활어를 잡아서 포를 뜨고 썰고 배달까지 하며 악착같이 살았던 시간이었다. 너무 바빠서 밥 먹을 시간도 없을 때면 어린 딸들이 소시지를 볶고 계란프라이도 해서 도시락을 싸 오곤 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주일 내내 쉬는 날 없이 일해도 힘들다고 느끼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못이라도 하나 박으면 집주인이 내려와서는 '남의 집 살면서 못 박고 사는 것 아니'라고 했다.
또 사용하지 않는 외부 화장실에 자전거를 뒀는데 태풍이 와서 화장실 유리창이 깨졌다. 그러자 우리 자전거 때문에 유리창이 깨졌다며 집주인이 수리비를 받아 갔다. 그래도 전혀 서럽지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집주인 구박받을 일도 없고 휴일마다 꼬박꼬박 쉬고 두 딸은 이제 내가 돌보지 않아도 될 만큼 컸음에도, 내 삶은 왜 이리 고달픈 걸까.
- <진실의 힘> 누리집 "내 남편은 중증 트라우마 환자입니다"에서
생존자이기 전에 피해자
사려니숲길 안내소에서 일한 지 딱 4년이 되었다. 아름다운 사려니숲길에서 일하니까 좋겠다 싶지만, 그는 여전히 약과 수면제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도 숲에서 일하면서 조금은 안정이 되어 가지 않을까 싶어 꿈이나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없어요. 미래에 대한 그런 두려움이나 이런 것들이 있어서 지금은 뭐 세우고 말고 없이 지금 있는 자체만도 힘들어서, 세울 뭐가 전혀 없어요."
김동수씨 얘기를 들은 김형숙씨가 덧붙였다.
"전에는 그래도 자신감이 있어 보였죠. 근데 딱 1년 사이에 바뀌었어요. 작년(2021년)에 그 7주기 전에 수면제 백여 알을 먹으면서 그때부터 이렇게 달라져 버렸어요. 예전에 남편이 집에 둔 다육식물 때문에 맨날 싸웠어요. 그만 사 오라고. 근데 다 뽑아 버렸잖아요. 또 자기 침대 만든다고 여기 나무 잘라 놓은 거 집에 실어 놨는데, 땔감 하라고 다 보내 버리고. 지금은 아무것도 관심이 없어요, 진짜. 차라리 나 눈치 보면서 다육이 사 오고 그럴 때가 나았지… 지금은 마라톤도 안 하지. 내가 봐도 무슨 낙으로 사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김동수씨는 자해를 다섯 차례나 시도할 만큼 분노가 컸다. 세상에 말을 걸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수면제를 먹어도 못 자니까 미칠 것 같아서, 푹 자고 싶어서 수면제를 백여 알 먹어 버렸다. 분노에서 불안으로 바뀌고 만 셈이다. 그는 여전히 아파하고 있다.
8주기가 다가오면서 김동수씨가 더욱 예민해지지 않을까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럴수록 아내 김형숙씨는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낼 수밖에 없겠다 싶다.
제주도에 사는 김홍모 만화가는 그동안 김동수씨 가족을 인터뷰하고 웹툰을 연재하다가 책으로 펴냈다. <홀: 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김홍모, 창비, 2021)이다. 세월호에서 김동수씨가 겪고 본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들을 다시 살릴 '제생지'
2020년 2월 22일. 제주도에 있는 세월호 생존자들에게는 특별한 날이다. '제생지'가 만들어진 날이다. '제주 세월호 생존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모임'을 줄인 말이다. 제생지를 소개하는 리플릿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입은 있으나 소리가 되지 못한 제주 세월호 생존자 24명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며 기계적 행정에 멈춘 시선을 넘어 생존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홀로 쓰러지지 않도록 서로 용기와 버팀목이 되고자 제생지를 시작합니다.
몇몇 사람들이 모여 제주에도 생존자들이 많으니까 생존자 공간을 만들자고 했다. 이곳에는 김동수씨가 입었던 파란 바지와 구명조끼가 있다. 제생지는 '수상한집 광보네' 건물 3층에 있다. '수상한집'은 조작 간첩으로 억울한 누명을 쓴 강광보씨가 무죄를 선고받고 받은 보상금과 성금으로 지은 건물이다.
재정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24명의 목소리를 담고 기억을 기록해 가는 중이다. 생존자들은 치료 예상 기간이 훨씬 지나도록 여전히 병원을 다니며 수면제와 신경안정제 등을 먹고 있다. 제생지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도울 방법을 찾고 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많은 사고가 이어졌다. 사고뿐만 아니라 일터에서 재해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는 거의 날마다 뉴스에 나온다. 그 이전에도 사고와 재해가 끊이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목숨을 잃었는데도 우리는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내지 못하고 있다.
생존자들 사례와 그 가족들의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면서 사회적 참사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고 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 내실 있는 지침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물론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아야겠지만, 혹 일어나더라도 당사자들이 겪는 트라우마를 세심하게 살필 줄 아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작은책(www.sbook.co.kr)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