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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새로 칠한다면서 A4 용지에 인쇄된 3가지 안이 엘리베이터에 붙었다. 파란 바다색과 밝은 회색의 조합, 기존과 동일한 크림색과 따뜻한 오렌지색의 조합, 세 번째 안은 기억이 안 난다.

얼핏 보기에 파란 바다색과 밝은 회색 조합이 아주 산뜻해 보여 눈길을 끌었는데, 역시나 주민 투표에서 첫 번째 안이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구 대표로 남편은 기존과 같은 두 번째 안에 한 표를 행사했단다. 다른 일로 마음이 바빴던 나는 "역시 당신은 진득한 양반이야"라며 영혼 없는 한 마디를 해 주었다.

4월 들어 구역을 나누어 도색 작업이 시작되었다. 근처를 지나다니면 페인트 냄새가 진동하기를 십여 일, 마침내 첫 번째 구역의 도색 작업이 완료되었다. 슬쩍 들여다봤더니 아뿔싸, 저것이 정녕 그 첫 번째 안이었다고? 산뜻하게 빛나던 그 파란 바다색과 밝은 회색 조합의 색깔이라고?

엘리베이터 벽에 붙어 환하게 빛나던 파란 바다색은, 조도가 낮아 대체로 어둡고 냉하며 넓은 지하 주차장에서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마치 깊고 서늘한 바닷속 느낌 같다고나 할까! 차라리 아직 도색을 안 한 옆 구역이 차라리 더 환하고 마음 편하게 느껴졌다.

색이라는 것은, 사실 빛과 공간의 변주 속에 오만가지 조화와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 아니던가! 그러니 지하 주차장 도색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이런 분야에 경험이 많은 전문가의 의견이 상당히 중요할 터이다. 

그럼에도 불빛 환한 엘리베이터 속에 붙어 있는 종이 조각이 주는 느낌만을 보고 다수결로 결정을 해버렸으니, 누구 탓을 할 것인가? 저녁 먹으며 이런 일을 무조건 주민 투표에 의한 다수결 결정으로 진행시킨 관리사무소가 생각이 없는 것 아니냐며 뭐라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어쩔 것인가!

우리가 놓치고 있는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요즘 들어, 전문적인 의사 결정이 필요한 일에 다수결의 논리가 치고 들어오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듯하다. 이런 다수결 위주의 문화 확산에는 구성원들의 다양한 의견 표출을 장려하고, 이에 의미를 부여하는 요즘의 사회 분위기가 큰 영향을 주고 있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IT 기술의 발달도 한몫을 하는 것 아닐까 싶다. 구성원들의 온라인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고, 설문조사나 투표 시스템도 비교적 용이하게 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사회에서 구성원이 집단의 의사 결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고, 적용을 확산시켜 나간다는 것은 장려되어야 한다. IT 기술이 이런 민주사회 인프라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에 기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뿌듯한 면도 없잖아 있다.

크고 작은 커뮤니티 관련 문제에 있어서의 궁극적 목적은 좋은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의사결정 이슈는, 그것이 국가 사회의 중요한 정책 결정의 문제이든 혹은 아파트 주차장 도색 같은 비교적 작은 이슈이든, 현명한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경험 많은 전문가의 의견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다수결이 참여한다는 절차적 행위가 주가 되다 보니 전문가의 역할은 슬쩍 뒤로 물러나게 되어 결과적으로 본말이 전도되는 경우가 생기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집단이 조금이라도 나은 의사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설문조사나 투표를 통해 구성원 개개인이 의견을 개진한다는 절차 상의 참여를 넘어서서, 구성원들이 전문가의 의견을 참고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와 토론의 기회가 함께 주어져야 한다.

이를테면, 우리 아파트 주차장 도색의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파란 바다색이 보기에 산뜻해서 눈에 먼저 띄지만, 아파트 지하 주차장처럼 어둡고 넓은 공간에 폭넓게 칠해지면, 자칫 어둡고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전문가 참조 의견을 알려 주었다면, 사람들은 아마도 한번 더 생각해 보았을지도 모른다. 즉, 다수결이 참여하는 투표 시스템만이 아니라 전문가의 참고 의견을 알려주고 구성원 간에도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창구가 지원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앞으로 IT 기술에 힘입어 다수결에 의한 의사결정은 점점 더 확산될 것이다. 이러한 다수결에 의한 의사결정은 민주적이라는 명분도 좋고, IT 기술 발달로 그 과정도 용이하고 비용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진행 과정에서 충분한 정보의 공유와 다양한 대안의 장단점에 대한 토론이 함께할 때 비로소 '다수결에 의한 현명한 의사결정'에 이를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놓치고 있는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버스는 파란 바다색 옷을 입고 이미 떠났는데, 나는 뒤늦게 궁리가 많아진다.

아무튼 앞으로 깊은 바닷속 같은 주차장을 드나들게 생겼다. 물론 곧 익숙해질 것이다. 그래도 한 동안은 마치 어두운 바닷속에 고래 한 마리 몰아 놓고 나오는 느낌으로 서둘러 빠져나오며, 나도 모르게 얼굴빛이 아주 조금 어두워지고, 주차장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도 아주 조금 차가워질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 쓴 글을 조금 정리한 글입니다.


#아파트 #주차장#도색#다수결#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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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T 분야 정부출연 연구소에서 일하는 공학자입니다. 연구자로서의 성장 및 과도하게 발달한 인터넷 문명의 부작용과 기술철학에 관심을 갖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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