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처럼 화상으로 온라인 교사 연수를 하는데 어딘가 낯설다. 마스크 없는 얼굴 때문이었다. 우리는 지난 3년간 도대체 무엇을 얼마큼 잃은 걸까?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여름의 문턱에 와있는 우리를 신나게 한다.
하지만 정말 모든 게 100% 돌아갈 수 있을까? 이미 네이버를 시작으로 혁신을 중시하는 기업들은 재택근무를 병행하는 근무 환경을 유지하기로 선언했다. '어디서' 일하는지 보다 '어떻게' 일하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업뿐 아니라 사회 각 분야의 조직과 개개인들은 팬데믹에 대응함으로써 생긴 변화 중 좋은 것은 취하고, 불필요했던 것은 과감히 버리는 체질 개선을 하고 있다.
코로나는 학교를 어떻게 진화시켰을까
학교 현장 역시 지난 3년간 무엇을 잃고, 또 동시에 새롭게 배웠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인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진화해 왔다. 실생활에서 생과 사를 결판 짓는 문제들을 해결해오면서 말이다. 코로나라는 팬데믹 상황이 학교 구성원들을 연습 시킨 역량은 무엇일까. 이 위기를 다른 종(種)들보다 현명하고 효과적으로 넘긴 학교 그룹은 어떤 DNA를 가지고 있었을까.
미국의 교육혁신 리서치그룹 NGLC는 연 초, <
무엇이 그들을 준비시켰을까>라는 리포트를 발행했다. 9개의 파트너 기관들과 함께 변화에 가장 빠르게 대처한 70개의 학교 및 교육지원청을 선정, 분석한 것이다. 그 결과, 1) 학생의 성공을 중심에 둔 미래지향적인 비전, 2) 건강한 조직문화, 3) 강력하고 유연한 시스템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음을 발견했다.
팬데믹 이전에 이미 '21세기 역량'을 졸업생이 갖춰야 하는 주요 가치로 여기고, 문서상이 아닌 실제 학교 운영에 있어 모든 구성원들이 비전을 합의하고 실행해 온 경험이 있었다. 코로나 시대를 거치며 전 학교 구성원이 학생의 역량이라고 내세운 문제 해결, 협업, 비판적 사고, 창의력, 소통, 빠른 판단과 유연함 등을 한 번에 연습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NGLC를 이끄는 앤디 칼킨스(Andy Calkins)는 최근 코로나로 야기된 교육과 고용의 격차를 뛰어넘기 위한 방법을 논의하는 온라인 포럼 '
Beyond the Gap'에서 "시스템은 우리가 어떤 가치를 우선에 두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라며, 코로나를 지나고 재정비하고 있는 학교들이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음을 강조했다.
리포트에 소개한 학교 사례를 들며 무엇보다 학습 모델에 학생을 중심에 둔 학교들이 성공했음을 보여줬다. 이들은 학생들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를 물었고, 정신적 심리적 안정에 관심을 가졌으며, 진도가 아닌 호기심에 기반한 배움의 기회가 끊기지 않도록 도왔다. 코로나로 인해 변화된 산업 구조 및 커리어에 맞춰 다양한 기업들과의 파트너십을 맺고 온라인 인턴십 등의 새로운 시도를 미루지 않았다.
온라인 포럼 'Beyond the Gap' |
미 전역에서 리얼 월드 러닝을 추구하고 있는 학교들의 네트워크인 STC(Schools That Can)에서 주관했다. STC에는 현재까지 15개 도시에서 170개가 넘는 공립학교, 차터 스쿨, 대안학교들이 함께하고 있다. 학생, 교사, 리더십에 대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학생들을 위해서는 초-중학교까지 주로 메이커 교육을 통해 리얼 월드 러닝을 강조하고, 고등학교에서는 진로와 직업과 연결되는 역량 개발에 초점을 맞춘다. 교사 대상으로는 교실에서 리얼 월드 러닝을 적용할 수 있도록 연수를 진행하고, 지역별 러닝 그룹이 있어서 서로의 노하우를 공유한다. 리더들을 위해서는 매년 STC 포럼을 열고, 리얼 월드 러닝 리더십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2017년부터는 리더십 그룹과 함께 만든 리얼 월드 러닝 루브릭을 만들어서 연계된 학교들의 지침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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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을 거치면서 사실 모든 학교들이 어댑티브 리더십을 발휘하여 잘 해낸 부분, 극복한 부분, 새롭게 시도한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런 시도들이 아예 시스템으로 자리 잡게 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
'학력 저하'보다 중요한 '학습 충동'
전국 시도교육감 선거 결과가 나왔다. 8년간 이어진 '진보교육감 전성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린다. 사실 진보냐 보수냐는 중요하지 않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역량을 키울 수 있으면 된다. 그런데 온갖 후보들의 주요 정책을 살펴보면 무언가 잘못 짚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코로나로 인해 저하된 기초학력에만 집중하면서 기존 수업의 문제점은 놓치고 있다. 학업성취도 진단평가의 강화를 통해 기초학력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른 모든 논의를 무력화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원격수업이 장기화되면서 자기 주도 능력이 떨어지고, 사교육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인 '학업 중간층'이 사라졌다는 논리를 유심히 들여다보자. 이들에게 배움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교사가 지켜보는 감시 상황 안에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내용을 학습하고 점수로 평가받는 외재적 동기에만 익숙한 학생들에게는 자율성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본인이 배우고 싶은 것을 찾아내기 어렵다. 그들에게는 내재적 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기초학력 저하는 그동안 대다수의 청소년들에게 자발적인 배움이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지표로 해석할 수 있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문화를 넘어서 (1971)>에서 "학생들의 학습의욕 결핍에 대한 우려를 많이 듣게 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학습 충동이 얼마나 강한지 일반적으로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일축한다. 그는 인류의 존속을 위한 성 충동만큼이나 강력한 게 학습 충동이며, 성 충동은 개인의 생존에 불가결한 것은 아니지만, 학습은 개인과 문화와 종의 존속을 확보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가장 진화된 뇌를 지닌 인간은 학습하는 유기체이다. 인간은 본래 학습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문제는 어떻게 학습하고 어떤 환경 및 구조가 가장 학습에 적합한가 일뿐이다. 에드워드 홀은 다양한 뇌과학 연구를 사례로 들며 정보의 기억이나 통합에 사용되는 감각 양태가 개개인의 특질에 따라 다름을 밝힌다. 하나의 시험, 하나의 커리큘럼, 하나의 교수법으로 모든 학생의 학습 충동을 충족시켜줄 수 있다는 환상은 이제 깨져야 한다.
학습 충동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의 말을 빌려보자면,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이고 유해한 일은 자신의 가능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면 쉴 새 없이 밀려오는 공허함, 갈망, 좌절감, 엉뚱한 분노가 인간을 집어삼킨다. 그 분노는 자기 내부로 향하건 타인에게 미치건 무시무시한 파괴적 결과를 낳는다."
코로나로 인한 학력 저하 현상은 학교 교육 환경이 학생들의 학습 충동, 즉, 배움의 호기심을 얼마나 억제하고 제한해 왔는지를 반증해 주는 수치이다. 배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학생들은 획일적으로 짜인, 이미 정해진 교과과정에서 가장 잘 배울까, 아니면 자신의 호기심을 바탕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교과과정에서 가장 잘 배울까?
학습자들이 실제 세상에 적용되는 주제를 가지고 자기 주도적인 학습 경험을 할 때, 그들의 배움은 교실을 넘어 실제 삶에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리얼 월드 러닝은 학생 주도 배움의 환경을 만드는 궁극적인 지향점이다.
리얼 월드 러닝
리얼 월드 러닝은 복잡하고 실질적이며 상호 연결되어 있는 '실제 세상'을 통해 개인의 관심사를 찾아가는 모든 배움의 형태를 말한다. 지식을 적용해 탐구하고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학습자가 전문가 및 지역사회와 관계를 맺고, 새로운 인적 자본(사회적 자본)을 얻게 된다. 이렇게 학교를 벗어나 실제 세상에서 익히는 역량은 청소년의 삶의 성공을 위한 중요한 토대를 마련한다.
리얼 월드 러닝의 핵심은 지금 내가 배우는 것이 현실과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배움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의 관심사에서 발견한 주제나, 실제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슈를 배움의 주제로 가져온다. 그렇기 때문에 리얼 월드 러닝은 다양한 교과/주제가 결합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우리 주변을 둘러싼 환경이 독립된 지식으로 분절되어 있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① 배움은 분절된 교과 공부가 아니라 여러 과목이 통합된 형태로 이루어질 때 일어난다,
② 배움은 진짜 세상 속에 존재한다,
③ 배움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나 지역사회와의 협업을 통해 진짜 세상의 맥락을 확보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리얼(Real)', 즉, 실제화된 학습(Authentic Learning)을 통해 배움에 동기부여를 하고, 궁극적으로 학습자가 스스로 배움에 몰입함으로써 역량을 체화하는 환경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내가 지난 8년간 관찰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국내외 청소년 주도 프로젝트의 공통점을 분석한 책 <리얼 월드 러닝>에서는 3가지 실천 역량을 연습하는 교육 환경을 제안한다.
• 탐색 역량: 나의 관심사에 기반한 주제를 탐색하기. 배움의 동기는 배우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학습 목표가 정해져 있을지라도 주제에 대한 선택권을 학습자에게 줄 수 있도록 한다. 주어진 문제만 풀어온 학습자에게는 주제를 탐색할 시간이 필요하다.
• 연결 역량: 주제와 연관된 사람을 연결하기. 자신이 발견한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젝트, 관심 있는 주제를 깊이 탐구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배우는 과정에서 관련된 사람들을 직접 만날 수 있도록 한다. 원하는 자원을 발굴하고, 섭외함으로써 사회적 관계망이 넓어지고 경험이 확장될 수 있다. 이들을 '제3의 어른'이라 부른다.
• 실행 역량: 사용자가 있는 산출물 만들기. 나 혼자 즐기고 끝나는 취미, 혹은 교사에게만 검사받고 끝나는 숙제가 아닌, 대중에게 공개할 수 있는 형태로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만들 수 있도록 한다. 공동체를 위한 프로젝트,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할 때 학습자의 동기가 올라간다.
학생의 관심사로 시작한 배움의 시작, 중간, 끝은 전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존에는 학교와 세상 사이에 시차가 컸다면, 리얼 월드 러닝은 학교와 세상의 시차를 좁힐 수 있는 방법이다. 변화의 시대에서는 스스로 배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호기심에서 시작하는 진짜 배움은 학교와 세상이 연결되는 지점에서 일어난다. 기존의 입시 위주 교육이 아닌 진짜 세상을 통해 자기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 학습 충동을 살리는 학교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교육 비영리단체 '유쓰망고'는 코로나 때 바로 이 리얼 월드 러닝을 실험했다.
리얼 월드 러닝 실천 교사 모임을 만들고, 만나기 힘든 외부 전문가들과 오히려 손쉽게 온라인으로 연결해 깊이 있는 수업을 진행했다. 청소년들의 관심사, 배우고 싶은 것에 집중한 수업을 기획하니 학습동기가 올라가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앞으로 연재될 기사를 통해 그 사례들을 소개하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유쓰망고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https://blog.naver.com/youthmango)
*필자 소개
김하늬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교육 비영리단체 유쓰망고(www.youthmango.org)를 운영한다. '청소년들이여, 망설이지 말고 Go!' 라는 뜻의 유쓰망고는 학습자 중심 배움의 환경을 만들기 위해 교사 연수, 프로젝트 수업 컨설팅, 교육 혁신 컨퍼런스 개최 등의 일을 한다. 저서로 <리얼 월드 러닝: 학교와 세상을 연결하는 진짜 배움>(2021), 검인정 교과서 <체인지메이킹> (2019), 공역서 <디퍼러닝: 21세기 학습역량을 키우는 융합교육 혁명>(201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