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가 짧다고들하지만 나는 언제부터인가 명절연휴가 짧다는 생각은 하지않게 되었다. 차례나 성묘는 없이 그저 부모님만 찾아봬면(그마저도 건너 뛰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때 우리집은, 큰아버지 댁은 종교적 이유로 우리 아버지는 둘째라는 이유 등으로 제사나 차례를 지내지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나는 제사나 차례 지내는 절차나 의미를 전혀 모른채 어른이 되었다.
나이가 들면 사람의 관심가는 분야나 생각이 미치는 것들이 자연히 젊었을때와는 다른 것으로 이어진다. 나이가 50이 되고보니 나 자신 보다는 주변을 살피는 것이 자연스럽다. 처자식의 생활이나 부모님의 건강 등이 주요관심사고, 또 조상(祖上)님을 위하는 마음도 자연스럽게 예전보다는 커진다.
그런 생각의 변화가 가져온 일상의 변화였을까? 딸아이도 이제 몇달 후면 고등학교 2학년이고보니 내가 어렸을때 좀 부족했다고 여긴 부분을 채워주어야겠다는 차원에서 올해는 '새삼스럽게도' 차례를 올려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아는게 없어서 네이버 검색을 통해 음식 차리기나 차례 지내는 순서 등을 급히 알아보았다. 간소화되었다고는 하지만 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순서를 외우거나 머리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것이 쉽지만은 았았다. 더 깊이 들어가다보면 왠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것 같은 생각에 나는 메모지를 꺼내들고 복잡한 내용을 키워드 중심으로 간략히 정리했다. 축문도 어려운 한자공부는 생략하고 그저 현대 우리가 쓰는 말로 편지쓰듯이 조상님들께 전하는 마음을 간략히 적었다.
음식은 예전부터 추석때면 먹었던 음식들 그대로였다. 송편이나 삼색전, 과일 조금이 전부였고 다만 추가된 것은 전통주와 약과 몇알이었다.
절차나 격식은 미흡하더라도 정성만큼은 조상님들께 부끄럽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차례를 시작했고, 메모지에 적어놓은 순서를 가족 구성원과 그때그때 자연스러운 대화를 통해 공유하면서 차례를 끝마쳤다.
우리집 차례에 있어 가장 중요한 특징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주인공'으로서 차례를 지냈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 집안과 아내 집안 양가의 선조(先祖)님들을 모두 모실수 있도록 지방을 썼다. '남양홍씨선조신위', '문화류씨선조신위' 두 개의 신주를 모신 것이다.
진행은 내가 주로 하였지만 아내와 딸아이 모두 각각 '헌주'하였고, 축문에는 나와 아내, 딸 아이 모두의 이름을 호명하며 후손으로서 감사의 뜻으로 조촐한 음식을 올리오니 기쁜 마음으로 흠향해주십사 축원하였다.
지내지 않던 차례를 지내는 것에 대해서 가족 구성원의 동의나 공감을 구하는데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하기도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특히, 딸아이와는 '차례'라는 '행사'를 함께 치루면서 무엇인가를 함께 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음복을 하면서 술을 두 잔 주었는데 빨개진 얼굴이 귀엽기도 했고, 딸아이 자신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서 엄마,아빠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덩달아 좋아진 것은 아내다. 요즘 부쩍 딸아이와 갈등이 많았는데 오늘 함께 차례를 지내면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대화의 양이 늘었을 뿐만 아니라 대화의 저변에 흐르는 '공감(共感)'이라는 부분에 있어 오늘처럼 딸아이와 아내가 깊은 교감을 한 것은 정말 몇년만의 일인것 같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처가에 다녀오는 차안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잠깐 이런 생각을 했다. '조상님들은 만족 하셨을까?', '음식도, 격식도 형편없는 차례였는데 결례는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곧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조상님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니 좀 서툴고 차린것이 빈약하다는 이유로 내 후손이 따르는 술잔이며 내게 올리는 절이 밉게 보일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차례상을 모두 치우고 마주앉은 아내가 내게 '지낼만 한데?'라는 말을 건냈다. 이것은 '나쁘지 않았어'와 동의어이고 더 본질적으로는 '차례를 지내서 좋았어'로 해석해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조심스레 들었다.
내년 설날은 떡국을 올리고 오늘처럼 차례를 지낼 생각이다. 물론 남양홍씨, 문화류씨 양가(兩家) 선조님들을 모두 모시고, 나와 아내와 딸아이가 모두 제주(祭主)가 되어 지내는 우리집만의 방식의 차례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