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안 들을 줄 알았던 말을 며칠 전 또 듣고 말았다. 친하게 지내는 후배와 오랜만에 만나서 안부를 나누던 중, 후배의 30대 조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잘 지내냐는 통상적인 인사를 건넨 뒤였다.
"성실하게 회사 잘 다니고 모임에서 장도 맡고 잘 지내요. 그런데 결혼을 안 해서 큰 걱정이에요."
후배는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 걸 보니, 자신 앞에 있는 내가 50대 비혼이라는 사실을 깜빡한 모양이다. 이제 그런 걸 일일이 고려할 관계가 아니니 그럴 수 있다며 넘기긴 했지만, '결혼 안 해서 걱정'이라는 말이 고어(古語)처럼 이질적이고 생경하게 느껴졌다.
이제 50대인 나에게는 그런 말조차 하는 사람이 없기도 하고, 이제 1인 가구가 전체 인구의 1/3 수준에 이르다 보니, 옛날처럼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훨씬 줄었을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다 그날 문득, 지인에게서 결혼 안 해서 걱정이라는 말을 들으니, 어디선가는 아직도 이 낡아빠진 말들이 유령처럼 부유하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치열하게 살고, 치열하게 놀던 친구들이 결혼하면서 40대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이 들은 말이 있다.
"괜찮은 사람 같은데 왜 결혼을 안 했어요?"
"멀쩡한데 인연을 못 만난 걸 보면 너무 눈이 높았나 보다."
결혼을 안 했다는 이유로, 나는 괜찮지 않은 사람, 멀쩡하지 않은 사람, 뭔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약점이 있는 사람, 눈이 높은 사람 등등으로 평가되곤 했다. 내가 결혼을 하지 못한 이유를 그들 스스로 찾고 싶어 했고, 그런 걱정을 빙자한 무심한 말들 속에는 불행하고 결핍이 있는 불완전한 상태라는 낙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혼이 사랑의 완성도 아니고, 결혼한다고 해서 결핍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건 결혼한 사람들이 더 잘 알 텐데 말이다.
상당히 문제적인 나경원 부위원장의 발언
며칠 전, 이 비슷한 말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인 나경원씨를 통해 또 들었다. 지난 16일 한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출생률 제고에 대한 인식 개선 필요성을 말하던 중, 그는 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를 언급하며 "혼자 사는 것이 더 행복한 걸로 인식이 되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출생률이 떨어지는 원인을 비혼의 증가로 본 것인데, 비혼이 많아지는 이유로 <나 혼자 산다>라는 프로그램을 콕 짚었다. 혼자 사는 게 행복하다는 인식을 주기 때문이란다.
이 발언은 상당히 문제적이다. 일단 전후 관계가 바뀌었다. 혼자 사는 걸 행복하게 인지시켜서 비혼이 많아진 게 아니고, 이미 사회 환경상 비혼이 늘고 있기 때문에 비혼도 행복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 것뿐이다.
그동안 미디어에서 비혼을 얼마나 불행하고 결핍된 존재로 소모되었는지 따져보면 헤아릴 수조차 없다. 지금도 <미운우리새끼>나 <돌싱포맨>은 혼자 사는 남성을 다른 사람의 보살핌이 필요한 부족한 존재로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다. 비중으로만 따지면, 오히려 <나는 솔로> <환승연애> 같은 짝짓기 프로그램이나 <슈퍼맨이 돌아왔다> <동상이몽> 등 결혼해서 행복한 내용의 프로그램이 더 많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드라마도 결혼해서 행복하다는 메시지로 가득 찬 것들이 다수다. 불과 얼마 전까지 한 주말 드라마에서는 전문직 아들들에게 부모가 6개월 이내에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오면 아파트를 준다고 하기도 했다. 결혼을 해야만 인생의 큰 과업을 이룬 것이고,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되며, 결혼하면 행복하다는 메시지가 여전히 미디어에 차고 넘친다.
유독 MBC의 <나 혼자 산다>의 영향만 크게 받을 리는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혼자 산다는 걸 결핍의 상태나 행복하지 않은 것으로 상정하는 사람들... 너무 무례하다. 2021년도 기준 1인 가구 비율이 33%인데, 설마 나경원 부위원장은 국민 1/3이 적당히 불행하게 살길 바라는 것인가?
나 부위원장의 '캠페인' 발언이 협박으로 들리는 이유
통계청이 지난 16일 발표한 '2022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결혼하지 않는 이유로는 10명 중 3명이 결혼자금 부족을 꼽았다. 그 외에도 경제적인 이유가 컸고, 여성들은 딱히 '결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라는 답변도 많았다.
여성의 관점에서 보면, 여성이 결혼과 출산을 선택하는 건 자신의 삶을 갈아 넣는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은 여성이 '독박 육아'를 하는 장면이 미디어에서 많이 사라지긴 했으나, 여전히 가사노동과 육아 노동은 여성에게 많이 치우쳐 있다. 일하던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나 부위원장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행복하다는 인식이 들 수 있도록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면서 "모든 언론, 종교단체, 사회단체들이 함께하며 어떤 캠페인(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도 했다. 캠페인이라고 하니 생각나는 표어가 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지금은 저출산이 문제지만 1970년대만 해도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캠페인이 어디서나 들렸다. 생각해 보면, 국가가 캠페인으로 여성의 몸을 통제하며 출산을 제한한 폭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출생률을 높이기 위해 여성의 몸을 또 통제하려고 한다. 나 부위원장의 발언이 '모든 언론, 종교단체, 사회단체들이 참여한 전방위적 캠페인'이라는 명목하에 여성을 압박하겠다는 협박으로 들리는 이유다.
그런 낡은 말들의 잔치보다, 여성이 살기 안전하고 평등한 세상인지, 그 지점부터의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의 행복 인정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얼마 전 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집필한 정서경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자들은 모든 길에 선택지가 있어요.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가지면서 동시에 일을 할 수 있죠. 하지만 우리가 일로서 인정받고 싶으면 아직까진 하나의 선택지밖에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단 말이에요. 여자들이 계속 출산 파업을 한다면 사람들이 깨닫는 게 있겠죠."
나경원 부위원장도, 출산을 장려하는 사람들도 빨리 깨닫기를 바란다. 자신이 행복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나와 다른 편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죄책감을 주려 하는 한, 우리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