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다. 하루 밖에 안 남았다는 아쉬움보다 기쁨이 더 큰 날이고 돌아가신 시할아버지가 유독 떠오르는 기념일이다.
시할아버지는 그 당시 70대셨다. 기골이 장대하지 않았다. 작은 몸집에 키도 큰 편이 아니었지만 장군 같은 기품이 흐르고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50대 초반이었던 시아버지도 할아버지 앞에선 고개를 조아렸다. 우리 모두가 그랬던 것 같다.
38년 전, 면소재지가 고향인 아버님은 시내에 호텔이라는 이름으로 5층 건물을 지으시고 12월 31일을 개업 날로 정해놓으셨다. 지하에는 나이트클럽, 1층에는 식당 커피숍 미용실, 2층에는 결혼식 홀이 2개 있었다. 개업 준비를 앞두고 식당에서는 음식을, 미용실에서는 드레스를 최고급으로 장만하며 이를 진두지휘하는 시부모님은 매우 분주했다.
대소사를 부자간에 상의하는 가운데 할아버지의 획기적인 발상으로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12월 24일, 개업을 일주일 남겨놓은 상태였다.
"개업식 날 사람들이 올 텐데 그 참에 애들(손주들) 결혼도 하면 좋겠다."
할아버지는 의견을 묻는 게 아니고 그리 하라는 거였다. 개업식만으로도 벅찬데 아들과 딸의 결혼을 같은 날에 하라는 게 말이 되는가. 황당한 말씀에 아버님은 펄쩍 뛰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지만 불도저 같은 할아버지의 일처리를 보아 온 터였다.
"드레스도 있고 음식도 있는데 뭐가 문제냐, 무엇보다 사람들 여러 번 오게 하지마라, 봉투 세 번 받지 말고." 단순했다. 할아버지는 더 이상 아들의 답변을 듣지 않았고 아버님은 거역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합리적이고 넉넉한 마음이 떠들썩하게 전해졌다.
연애 중이던 우리 넷은 철없이 좋기만 했다. 반지 한 쌍 한복 한 벌을 번갯불에 콩 튀기듯 마련했다. 결혼준비를 위해 고민하고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신혼여행에서 입을 옷을 사며 우리 모두는 싱글벙글했다.
혼인신고만 하고 유학길에 오르기로 한 시누이네가 더 기뻐했다. 제대를 코앞에 두고 학업 1년을 남겨 놓은 남편과 나는 대책 없이 떠밀리고 있었지만 행복한 순간이었다. 오빠를 두고 여동생이 먼저 결혼할 수 없다는 할아버지 말씀이 있었고, 둘 다 연애 중이니 결혼하면 되는 거였다. 그렇게 소설처럼, 꿈처럼 개업식과 두 쌍의 합동결혼식이 하루 한 날에 진행됐다.
완고하셨지만 화통하시고 부지런하셨던 할아버지. 도의원을 지내셨고 고향 이곳저곳에 기부도 많이 하셨다고 들었다. 새벽 서너 시면 일어나 붓글씨를 쓰시고 동이 트면 마당을 쓰는 소리로 식솔들의 잠을 깨우셨다. 부유해도 근검하셨던 할아버지는 구부러진 못도 망치로 펴서 다시 썼다. 부지런한 사람을 으뜸으로 인정하셔서 가족들 중 작은며느리인 어머님을 특별히 아끼셨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사라져가고 있다. 할아버지 기일도 차츰 소홀해지는 요즘, 한 해 마지막 날에서야 그 분의 소중한 뜻이 가슴에서 울려온다.
있어도 더 갖고 싶은 게 재물이다. 굴러오는 돈 앞에서 마음을 비우는 것은 쉽지 않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그런 생각과 결단을 할 수 있었을까. 할아버지의 단순한 논리의 뿌리가 궁금해진다. 그분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그리운 요즘이다.
남편은 오늘 같은 날, 기쁨 반 억울함 반이다. 결혼과 동시에 망년회 한 번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며 할아버지를 원망(?)한다. 결혼기념일만은 아내와 함께 보내야 한다며 가정적이고 자상한 남편의 콘셉트로 돌아와 있다. 오늘을 놓치면 새해가 괴롭게 시작할 거라는 것쯤은 아는 것 같다. 연말을 가정에서 보내라는 할아버지의 예지몽이라고 편들며 조상님 덕으로 부부애를 다진다.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몸으로 보여준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날이다. "할아버지 새해에는 더 잘 살아볼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