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13일 제주 합동연설회에서 제주 4.3을 김일성에 의해 촉발된 사건이라고 발언한 것이 논란을 빚고 있다. 14일에는 자신의 전날 발언에 대하여 "김일성 일가 정권에 한때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희생자들에게 용서를 구한 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면 이야말로 4.3 정신에 반한다고 생각한다"며 자신의 기존 주장을 반복했다(관련 기사:
'제주4.3 김일성 개입' 근거 묻자 태영호 "유튜브로 북한 드라마 봐라" https://omn.kr/22qk0 ).
'제주 4.3 당시의 봉기가 김일성에 의해 벌어졌다'는 주장은, 제주 4.3 진상조사보고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내용이다. 태영호 의원은 자신이 북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팩트를 얘기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북한 정권에 의해서 임의로 배치된 사실을 역사적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의심도 하지 않고 북의 주장에 동의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해방 후 혼란기에 김일성은 유엔의 남북 총선거 안을 반대하고 대한민국에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며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남로당에 전국민 봉기를 지시했다"며 "4.3 사건 주동자 '김달삼·고진희' 등은 북한 애국열사릉에 매장돼 있고, 이들을 미화한 북한 드라마를 유튜브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는 태영호의 주장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단독 봉기 결정을 사후적으로 남로당-북로당과 김일성의 논리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4.3 봉기와 탄압은 제주도만의 특성과 독립성을 빼놓고는 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태영호의 논리 들여다보니
태영호의 논리는 제주 4.3 당시 봉기가 남로당 제주도당에 의해 일어났고, 그것은 남로당 중앙의 5.10 총선거 반대 그리고 이를 지도한 박헌영과 김일성에 의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흐름이다.
그러나 제주 4.3 진상조사보고서는 봉기 결정 과정에 대해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1947년 3.1절에 벌어진 발포사건과 이에 항의하는 민중을 경찰이 강하게 탄압했고 미군정은 제주도를 붉은 섬(Red Island)으로 규정하고 이를 지원했다.
좌익세가 강하던 제주에서 남로당 제주도당은 탄압 속에서도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는 1948년까지 1월 22일 조직이 대대적으로 탄로나기 전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1.22 검거사건은 당시까지 합법정당이던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을 드러냈고 위원장인 안세훈과 훗날 무장대 1대 사령관을 지내는 김달삼, 2대 사령관을 지내는 이덕구까지 검거됐다.
4.3 연구자인 양정심은 <제주 4.3항쟁 – 저항과 아픔의 역사>에서 대대적인 지도부 검거와 조직 노출 그리고 3월에 일어난 양은하, 김용철, 박행구 고문치사사건이 4.3 봉기 결정을 촉진했다고 설명했다. 기존 연구에서는 직전 2월에 있었던 신촌회의에서 청년 강경파와 장년 온건파 사이의 논쟁 끝에 봉기가 결정됐다고 봤지만, 양정심은 당시 이견이 있기는 했어도 봉기에 대한 반대는 두드러지지 못했고 대체로 무장투쟁 결정에 따르는 분위기였을 것으로 보았다.
무엇보다 제주의 봉기 결정 과정은, 남로당 중앙이 추진하는 5.10 총선거 반대투쟁과는 그 유형이 달랐다. 남로당 중앙은 2.7 구국투쟁과 5.10 단선반대투쟁 당시 야산대를 통한 무장투쟁을 동원하기는 했지만 보조적인 수단에 그쳤고, 제주에서는 육지에서처럼 2.7 구국투쟁 당시 대대적인 총파업과 사보타지(sabotage, 항의표시·방해)가 이뤄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제주 4.3 봉기는, 같은 해 4월 18일 남북연석회의를 준비중이던 김일성과 북의 지도부에게 달갑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만일 봉기가 북과 연계된 것으로 여겨진다면, 남측 정치지도자들이 연석회의 참가를 거부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 남북에 따로 정권이 들어서는 것이 확실해진 이후 열린 8월의 해주인민대표자회의(1대 사령관 김달삼 등이 제주를 이탈해 여기에 참석했다)와 달리 남북연석회의에서는 제주의 봉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남로당 중앙이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조직하고 활용한 것은, 2월과 5월의 활동으로 조직 역량이 소진되고 노출되었으며 남북에 정부가 따로 들어서는 것이 명확해진 이후부터였다고 알려져 있다.
육지와는 조건 달랐던 제주... 독자성 이해해야
제주는 4.3 이전부터 육지와는 사회적 조건이 달랐다. 오사카를 오가는 정기선(배)이 있었고 농사가 어려운 제주의 특성상 일본으로 나간 노동자들이 많았고, 이들에 의해서 해방 이후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강했다고 한다. 또한 미군정에 의해 금방 해산되거나 우익의 이탈에 의해 약해진 육지의 인민위원회와 다르게 제주의 인민위원회는 오랜기간 유지되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제주의 특성과 조건은 3.1 사건 이후 제주도민을 단결하게 만들었지만, 미군정과 육지에서 파견된 경찰과 청년단에게는 위협요소로 여겨지게 했다. 4.3은 결정과정에서도 육지의 좌익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았지만, 그 조건부터도 제주만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태영호의 발언은 4.3을 김일성과 연관시켜 폄하하는 색깔론일 뿐만 아니라 제주만의 독자적 역사와 제주 민중의 능동성을 무시하고, 이들을 김일성과 남로당 중앙에 의해서만 조종되는 폭도로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더 문제적이다.
태영호 의원이 살아온 사회는 항상 중앙에 의해 지방이 종속되고 지배자가 제시한 서사에 피지배자들이 따라야 하는 사회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회의원 태영호라면 한국 사회를 변화시켜오고 억울한 죽음들을 복권시켜 준 권력으로부터의 진실의 자율성을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