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을 하기로는 했어도 걱정이 많았제. 머나먼 일본까지 와서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란지 여러 생각이 들었어. 그날 친구들이랑 법원으로 다 같이 손잡고 걸어갔는데, 그때 일이 지금도 눈에 아른아른해."
3·1절은 양금덕 할머니한테도 특별한 날이다. 일제강점기인 1944년 전남 나주대정공립소학교 6학년 재학 중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중학교도 보내 준다"는 일본인 교장선생님의 말에 속아 나고야로 끌려간 양금덕 할머니는 24년 전 1999년 3월 1일 동료 친구들과 함께 나고야지방재판소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피고는 일본 정부 및 미쓰비시중공업. 소송에 나선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은 이미 70대에 접어든 때였다.
"1919년 선배들처럼 우리도 당당하게 싸워나가자"
양금덕 할머니가 소송을 앞두고 근심이 가득했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사실 양 할머니로서는 이번이 일본에서 제기한 세 번째 소송이었다. 처음 소송에 나선 것은 31년 전인 1992년이었다. 1992년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가 주도해 원고 1273명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도쿄지방재판소에 제기한 일명 '광주천인소송', 그해 12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야마구치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지부에 제기한 일명 '관부재판' 소송에 추가해 1994년 다시 원고로 참여했지만, 모두 쓰라린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
일본에서 소송이 제기된 것은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회장의 요청에 일본 시민단체가 손을 잡은 덕분이었다. 일찍이 피해자들의 아픈 사연을 접한 일본 시민들은 이 회장으로부터 요청을 받고 지원단체 '나고야미쓰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소송을지원하는모임'과 '변호단'을 조직하고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본격적인 소송을 준비해왔다.
소장 접수일이 3월 1일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19년 3월 1일 일제의 폭압에 분연히 떨쳐 일어나 만세 시위를 벌였던 선배들처럼 우리도 당당하게 싸워나가자는 뜻으로 일부러 피해 할머니들과 지원단체가 논의를 거쳐 이날에 맞춰 소송을 시작한 것이다.
'나고야소송지원회'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양금덕 할머니를 비롯해 피해 할머니들은 소송을 제기하기 하루 전인 2월 28일 나고야에 도착했다. 이들은 3월 1일 오후 1시 민단이 주최하는 한 행사에 참여한 뒤, 2시 행사장을 나와 나고야지방재판소로 이동했다. 소장을 접수하기로 계획한 시간은 오후 3시였다. 이들은 재판소 인근에서 '나고야소송지원회' 회원들을 비롯해 변호사들과 합류했다. 언론사 취재 기자들도 나와 있었다.
소장을 접수하러 가기 위해 재판소를 50여m 앞두고 행진 대열을 갖췄다. 그러나 복잡한 심경들 때문이었을까. 서로 손에 손을 잡고 법원으로 향해 가는데 왠지 분위기가 침울하고 무겁기만 했다.
다카하시 마코토 '나고야소송지원회' 공동대표는 지난 2012년, 그때의 기억을 이렇게 말했다.
"3.1절은 우리에게도 각별한 날입니다. 근로정신대 소송은 1944년 사기와 협박으로 어린 소녀들에 대해 저지른 강제 연행·강제 노동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강제 연행으로부터 6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일본 재판소에서 당시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의 책임을 밝혀야 하는 이 재판은 법이라는 두꺼운 벽이 몇 겹이나 막힌 그런 곤란한 싸움이었습니다. 이날 한국에서 오신 근로정신대 할머니들과 굳게 손을 잡고 법원 앞을 함께 행진했던 일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이때 변호단장을 맡은 우치카와 요시카즈 변호사가 어색한 분위기를 돌려세우기 위해 "우리 이러지 말고 무슨 노래라도 하나 부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어느 할머니로부터 선창이 시작되었고, 이내 다 같이 목소리를 높여 노래를 불렀다.
- 구두가 울리다 -
おててつないで 野道を行けば 손을 잡고 들길을 가면
みんな可愛い 小鳥になって 모두 귀여운 아기 새가 되어
歌をうたえば 靴が鳴る 노래를 부르면 구두가 울린다.
晴れたみ空に 靴が鳴る 맑은 하늘에 구두가 울린다.
花をつんでは お頭(つむ)にさせば 꽃을 따서 머리에 꽂으면
みんな可愛い うさぎになって 다들 귀여운 토끼가 되어
はねて踊れば 靴が鳴る 뛰고 춤을 추면 구두가 울린다.
晴れたみ空に 靴が鳴る 맑은 하늘에 구두가 울리다.
이날 할머니들이 함께 부른 노래는 밝고 경쾌한 행진곡 풍의 일본 동요 '구두가 울리다'(靴が鳴る)였다.
"수십 년 지나서도 일본 동요 부르는 것에 더욱 슬퍼"
지난 25일 다카하시 마코토 대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할머니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이 노래를 같이 부르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죠. 할머니들이 일본 노래를 부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할머니들이 일본 동요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슬펐고 가해국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죠.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죠. 그때 우치가와 변호사도 똑 같은 기분이었다고 해요."
눈물이 많았던 다카하시 마코토 대표는 자꾸만 이런 생각에 눈물이 나와, 몇 걸음 뒤로 빠져서 눈물을 훔치면서 대열 후미를 따라갔다고 한다. 양금덕 할머니 또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기숙사와 공장이 한참 떨어져 있는디, 자고 일어나면 날마다 미쓰비시 공장까지 일하러 가거든. 똑바로 줄 맞춰서 앞 사람 머리 뒤 꼭지만 보고 가야 해. 인솔하는 사람이 있는데 옆에만 조금 쳐다봐도 뭐라고 하니까. 공장 오고 갈 때 부른 노래가 그 노래야. 행진곡. 항상 그 노래만 부르다 보니까 잊지도 안 해. 배운 것이 그 노래밖에 없으니까…" (양금덕 할머니)
일제에 우리말도 빼앗겨야 했던 시절이었다. 고작 13~14세에 불과한 여자아이들은 고향 부모를 그리워하면서도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이 노래를 불러야 했다. 결국 일본인들도 알고 할머니들이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라고는 일본에서 배웠던 익숙한 일본 노래밖에 없었다.
그날 피해 할머니들은 일본 변호사들과 지원단체 회원들과 함께 맨 앞에 서서 당당한 걸음으로 법원 앞으로 향했다. 당시 소장을 접수하러 나고야지방재판소로 걸어가는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 속에서도 당시의 기상이 느껴진다.
소송 원고은 양금덕, 진진정, 김혜옥, 박해옥, 이동련 할머니 등 5명에 이어, 이듬해 2000년 김성주, 김복례 할머니, 지진에 의해 목숨을 잃은 광주북정보통학교(현 수창초등학교) 출신 김순례의 유족 김중곤 할아버지 등 3명이 추가로 소송에 합류하면서, 소송 원고는 모두 8명으로 늘었다.
일본에서의 재판은 시간이 많이 걸렸다. 1심 판결을 받기까지 나고야지방재판소에서 가진 재판만 무려 22차례였다. 아쉽게도 소송은 2005년 1심에서 패소했다. 이어 7차례 변론을 거친 뒤 2007년 나고야고등재판소에서 패소했고, 이어 2008년 11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최종 패소(기각)하면서 기나긴 일본에서의 투쟁은 끝이 났다. 10년에 가까운 소송에 재판만 29차례 열리는 동안 양금덕 할머니는 노구에도 불구하고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았다.
비록 일본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소송은 한일 간 미해결 상태인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를 한일 양국 사회에 환기시키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남겼다.
2012년 5월 24일 한국 대법원이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과 관련해 기존 하급심 판단을 뒤엎고,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은 별개"라며,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하여는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며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취지로 사건을 파기 환송하면서, 새로운 분수령을 맞게 됐다.
이에 힘입어 일본 소송에 참여한 원고 8명 중 5명(양금덕, 김성주, 박해옥, 이동련, 김중곤)이 곧바로 2012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면서 불씨가 한국으로 옮겨왔다. 아울러 여러 우여곡절 끝에 2013년 11월 광주지방법원, 2015년 6월 광주고등법원에 이어, 마침내 2018년 11월 29일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그러나 모질고 모진 싸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2018년 대법원 승소 판결로부터 벌써 5년이 지났지만 사죄도 배상도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원고 김중곤, 이동련, 박해옥 3명이 차례로 숨을 거두고, 이제 생존자는 95세에 이른 양금덕, 김성주 할머니 2명뿐이다.
양금덕 할머니 인권상·국민훈장 수상도 무산
특히 윤석열 정부는 '한일 관계를 조속히 정상화해야 한다'는 구실로 일본과 관계복원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해 7월에는 미쓰비시중공업 상표권·특허권 특별현금화 명령 재항고심 사건과 관련해 외교부가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해 사실상 판결을 보류해 줄 것을 주문하는가 하면, 12월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최종 후보로 추천한 양금덕할머니에 대한 대한민국 인권상과 국민훈장 서훈 수상을 무산시키기도 했다.
정부는 지난 1월 12일 국회에서 토론회를 열어 일본 피고 기업(일본제철·미쓰비시중공업)이 져야할 배상금을 포스코 등 한국 기업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대신 피해자들에게 지급하는 방식을 사실상 공식화한 상태다. 피해자와 국민들의 강한 반발에 따라 일본에 '최소한의 성의'를 기대하고 있지만, 가해자인 일본 기업 대신 우리 기업이 그 책임을 뒤집어써야 하느냐는 비난을 피하기는 어렵다. 양금덕 할머니는 "내가 구걸하는 거지냐? 그런 돈은 받기 싫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 상태다.
"친구들 여럿이 있다가 다 죽고 이제 성주하고 나밖에 없어. 그런께 쓸쓸해. 그래도 혼자 덜렁 있는 것보다 성주라도 살아 있으니까…"
24년 전 3월 1일 일본정부와 미쓰비시를 상대로 싸움을 시작했던 양금덕 할머니는 오는 3월 1일 다시 서울로 향한다. 이날 오후 2시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리는 범국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광주에서는 버스를 대절해 시민들과 함께 오전 7시 30분 출발하기로 했는데, 95세 할머니도 그 버스 편에 다시 몸을 실을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