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적인 사기 범죄에 대해 앞으로 국가가 떠안을 것이라는 선례를 대한민국에 남길 수는 없지 않느냐."
지난 24일 인천 전세피해지원센터를 방문한 원희룡 국토부장관의 말이다.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선(先)지원 후(後)구상'에 대해 명확히 선을 그은 것이다. 실효성 있는 대책을 위해 피해자와 촘촘한 논의를 이어가야 하는데, 정부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직접 면담은 하지 않은 채 27일 오전 정부는 일방적인 대책을 발표했다.
대책의 주요 내용은 ▲피해 주택 매수를 희망하는 경우 우선매수권 지급 및 대출 확대 지원 ▲매입 대신 거주만 희망할 경우 LH 등 공공기관에서 매입해서 공공임대주택으로 전환 ▲생계가 곤란한 피해자 대상 긴급복지제도 동원 등이다. 국토부 내 전세 사기 피해지원위원회를 설치해 피해자 여부를 결정하면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전세사기 피해자의 주된 요구인 '전세보증금 반환 채권 매입'은 27일 정부 발표 대책에 담기지 않았다. '전세보증금은 사인 간의 채무·채권'이라는 정부여당의 입장을 고수하겠다는 것이다. 피해자와 제대로 된 대화 없이 발표된 대책은 이밖에도 다른 문제가 있다.
전세 사기 범죄의 정책 책임을 모르쇠로 일관하며 개인의 불행 정도로 취급하는 것이 문제 해결을 가로막는 가장 큰 벽이다. 심지어 이 벽은 피해자 지원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운운하며, 전세 사기 피해자를 악성 댓글에 의한 고통으로 밀어 넣고 있다(관련 기사:
'혈세 운운'에 울분 토한 전세사기 피해자들 "또 죽어야 법 바뀌나" https://omn.kr/23nsb ).
전세 사기 범죄, 정부 정책을 먹고 자란 사회적 재난
피해자가 '전세보증금 반환 채권 매입'과 같이 적극적인 피해 구제를 담은 정부 대책을 요구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전세 사기 범죄가 정부 정책 허점을 기반으로 기승을 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통상 집값이 너무 비싸 자가를 구입할 여력이 안 되는데 소득의 많은 부분을 월세로 지출하면 자산을 모을 기회조차 없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 전세다. 임차인 중 약 40%가 전세 계약을 할 수 있는 것도 정부 정책이 받쳐 준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전세보증금 대출제도는 지난 2008년 시행된 이후 계속 확대됐다. 특히 청년 대상 저금리 대출상품은 월세보다 전세를 선택하는 요인이 됐고, 대출이 가능한 최대 금액까지 전세가격이 오르기도 했다. 금리는 인하하고 등록 민간임대사업제도까지 도입되면서 자기자본 없이도 수백 채의 집을 소유해 임차할 수 있는 임대인을 탄생시켰다. 그런데도 민간임대사업자에 대한 국가의 제대로 된 관리감독이 부재한 탓에, 이들은 조직적인 사기로 임차인을 모으기까지 했다.
결국 임차인들이 눈 뜨고 코 베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 지난 수년 간에 걸쳐 정부 정책에 기반해 조성됐다고 할 수 있다. 전세 사기 범죄를 '사회적 재난'이라 명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도 거대양당은 국민 3명을 숨지게 한 재난에 대해 책임 있는 사과는 없고, 서로 남 탓하기 바쁘다. 어떤 피해자가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피해자 고통 외면하는 정부여당의 피해 구제 대책
그런데도 정부는 사적인 권리 관계에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며 뒷짐만 지고 있다. 원 장관은 '사기 피해에 대해 국가가 피해금을 먼저 반환하고 이후 환수한 적이 없으며 선례를 남겨서도 안 된다'고 다시 한 번 못을 박았다. 전세 사기 범죄는 정부 정책의 허점을 이용해서 횡행해졌음에도, 이를 외면하면서 적극적인 구제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전세보증금 반환 채권'이 담기지 않은 정부의 대책은 피해자가 경험하는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부 대책은 경매를 통해 집을 낙찰받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피해 주택을 사거나, 아니면 공공임대주택에서 시세보다 저렴하게 장기거주하면서 떼인 보증금에 대한 손해를 메우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애초 떼인 보증금에 대한 고려는 없이 사기 범죄를 당한 집을 소유하거나 아니면 그 집에서 계속 거주할 것만 허용하는 대책은 결국 정부가 피해자들의 구체적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정부 대책의 까다로운 피해 지원 대상 기준도 문제다. ▲대항력을 갖추고 확정일자를 받은 임차인 ▲임차주택에 대한 경·공매 진행 ▲면적·보증금 등을 고려한 서민 임차주택 ▲수사 개시 등 전세사기 의도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할 우려 ▲보증금의 상당액이 미반환될 우려 등 6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할 것을 요구한다. 기준도 문제지만, 이 조건에 따른 피해자 현황이 얼마나 되는지 정부도 밝히지 못한다는 것도 문제다. 제대로 된 실태조사를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는 정부의 대책에 대해 27일 성명을 내고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법안이 아니라 피해자를 걸러내기 위한 법안처럼 느껴질 정도"라고 입장을 밝혔다. 아직 전세 사기 범죄 가담자들이 명확히 다 밝혀지지 않아 수사가 개시되지 않은 사례도 많다. 결국 정부 대책은 고통받는 피해자들의 현실도 제대로 모르는 대책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전세 사기 재난 앞에 피해자 희생만 강요해서는 안 돼
사람이 살아가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의식주다. 주거는 개인이 알아서 할 문제가 아니라 기본권 보장을 위해 정부 개입이 필수적이라는 의미다. 그렇기에 정부는 전세 관련 정책을 수년간 확대해서 펼쳐왔다. 그런데 제도적 허점으로 전세 사기 범죄가 조직적으로 발생했다면, 피해 구제를 위해 정부도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사적 권리' 운운하며 뒷짐질 때가 아니다.
전세 사기 피해자들은 지난 26일 기본소득당과의 간담회에서 "(우리를) 세금 도둑 취급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라고 토로했다. 전세 사기 피해 책임을 피해자에게만 지우고, 피해자의 권리에 대한 요구는 혈세 낭비 프레임으로 여론을 왜곡하는 현실에 고통받고 있다. 전세 사기 범죄에 있어 제도적 빈틈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고 책임을 통감한다면,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전세보증금 반환 채권 매입'은 결코 무리한 대책은 아니다.
전세 사기 피해자는 전세 사기 피해실태와 현황에 대한 조사를 제대로 진행해 실효성 있는 특별법안을 마련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광범위한 전세 사기 피해 구제를 위해서는, 신속한 처리보다도 한 건이라도 제대로 처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정부여당은 정책의 실패를 국민에게 고스란히 짊어지게 하지 말길 바란다. 또한 고통을 분담할 방안을 함께 찾자는 피해자들의 대화 요청을 더 이상 거부해선 안 된다. '피 같은 세금' 프레임으로 피해 구제 가능성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피눈물을 먼저 닦아줄 정부여당의 역할이 절실하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신지혜씨는 기본소득당 대변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