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구나. 내 가족을 잃고 남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되니, 이런 자괴감에 빠지기도 해요."
2009년, 한 어머니는 아들을 먼저 보냈다. 아들을 따라가고 싶었던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그다음 해, 그는 한국생명의전화를 찾았다. 죽음의 문턱에 선 이들이 SOS 전화를 걸어오는 곳, 생명의전화다.
그는 이곳에서 제공하는 유족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한 뒤 상담사 교육과정을 이수했고 상담사가 됐다. 상담사는 모두 자원봉사자인데, 서울생명의전화 기준으로 그 수가 220여 명이다. 생명의전화는 24시간 365일 전화상담(1588-9191)과 한강교량의 SOS생명의전화를 운영하고 있다.
박인순(69)씨는 오늘도 새벽에 울리는 전화를 받는다. 그녀의 아들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12년째 말이다.
지난 5월 17일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 위치한 자살 유가족의 쉼터 '새움'에서 박인순 상담사를 만났다.
12년을 했지만 지금도 벨이 울리면 긴장된다
박인순 상담사는 주로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아침 9시 사이에 생명의 전화를 받는다. 대부분 새벽에 전화벨이 울린다고 한다.
"'얼마나 힘들면 여기까지 나왔을까. 그러나 그분들이 수화기를 들기까지 얼마나 망설였을까' 싶어요. 인간은 살고 싶은 기본적인 본능이 있거든요. 수화기를 드는 순간에는 누군가에게 '내 손 잡아줘' 하는 마음을 전하는 거예요. 그 용기, 참 대단한 거예요."
전화를 받으면 가장 먼저 위험한 장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마음을 안정시키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했다. 전화통화에서 그가 늘 하는 말은 이것이다.
"그래 같이 한 번 살아보자, 우리는 살아있을 때만 기회가 있다, 죽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SOS 생명의전화는 대부분 한강 교량에 위치에 있다. 그 현장에서 상대를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니기에 물론 한계는 있다고 했다.
"현장을 보지 않고 파악해야 하니까 정말 숨죽여서 그 사람의 호흡까지 감지해야 해요. 그래서 통화 한 번 끝나면 저도 맥이 탁 풀려요."
유족으로서 삶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과 다시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 가족을 잃고 나서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이 있냐 싶기도 했죠. 그런데 소를 잃었을지라도 누군가는 외양간을 고쳐야 하잖아요. 내 개인을 넘어서 지금 사회적 문제인데... 그리고 저는 아파봤으니까. 이런 아픔을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헤아릴 수 없어요. 더 이상 우리 안에서 아픔이 없어야 하잖아요. 내 주변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프겠어요."
소중한 사람의 극단적 선택, 그 뒤에 남겨진 가족들
박인순 상담사는 자신도 뼈아픈 고통을 겪어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이 고통을 겪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스스로 떠난 분들의 아픔은 고스란히 그 가족의 몫이에요. 어디 가서 얘기도 못해요. '다 부모 탓이지 뭐, 다 가정교육 탓이지, 아이가 괜히 그랬겠어?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그렇지' 이런 시선으로 보거든요. 부모도 '내가 조금만 더 잘했으면, 내가 미리 알아챘다면...' 이런 자책감을 끝까지 갖게 돼요."
자살 유가족은 사회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스스로 소외되기를 선택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유가족 모임이 중요하다"고 박 상담사는 강조한다. 자살 유가족을 묶어주는 매개가 있다면 생명의전화가 2021년 11월 개소한 '새움'을 꼽을 수 있다. '새움'은 세계 자살 유족의 날(매년 11월 넷째주인 추수감사절 전주 토요일)을 기념해 생겼다. 이곳은 유족 전문상담, 유족 자조모임, 치유 프로그램, 유족 드로잉모임, 소집단 애도상담 프로그램, 유족 북카페 운영, 유족 자유 모임공간 제공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유족들의 안전한 쉼을 지원하고 있다.
박 상담사는 '새움'이 필요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혼자 견뎌내긴 정말 힘들어요. 유가족들이 거리를 많이 방황하는데, 추울 때는 추운 대로 밖에서 헤매고 여름에는 땡볕에서 헤매니까 탈진까지 가요. 혹여나 다른 가족들이 연락이 안 되면 무슨 일이 생겼나 해서 바로 119에 전화하는 사람도 많아요. 예고된 죽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항상 불안한 거죠."
생명의전화를 알기 전 그도 10개월 넘게 헤맸다고 했다. 여기저기서 상담도 해보고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뭔가 풀리지 않는 게 있었다. 박인순씨는 생명의전화로 '제2의 인생'을 찾았다고 했다.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받고 서로 피드백도 해주는 게 정말 힘이 돼요. 빚진 마음이 드는데, 그 마음을 다른 유가족들 돌보면서 갚는 거죠."
마지막으로 박인순씨는 우울증을 겪고 있는 청년 세대에게 '힘들면 잠시 쉬어가라'고 당부했다.
"여태까지 해온 걸로 충분해요. 그 경험 누가 안 빼앗아 가요. 그 경험이 노하우가 되는 거죠. 지금 문제가 생겼다? 그래도 괜찮아요. 멈추는 게 아니라. 단지 쉬어가는 거잖아요. '먹고, 자고, 논다' 이것만 충전이 아니에요. 배움이든, 활동이든, 암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해보고 싶은 거 해보고 나를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세요. 진짜 나다움을 찾으세요. 그래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