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년의 레시피>를 2017년에 펴냈다. 책의 빛이 사위지 않고 지금까지도 독자들의 손에 닿는 건 기적이라고 여긴다. 소년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야간자율학습을 해야 했다. 밤 10시까지 교실에서 버티다가 며칠 만에 결단을 내렸다. 자퇴! 10대 청소년의 단호함에 맞설 수 있는 부모의 무기는 순도 100퍼센트의 유연함. 나는 그러라고 했다. 대신, 3개월만 학교에 다니는 게 좋겠다고 권유했다.
장래희망이 '탑블레이드 신발'이었다가 PC방 알바였던 소년은 한 달 넘게 골몰했다. 학교 공부 말고 무엇을 할까? 원치 않는 야간자율학습 때문에 깊은 밤까지 교실에 붙잡혀 있다는 억울한 마음은 하고 싶은 게 또렷해지면서 잦아들었다. 반드시 '이것'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소년은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야자 빼고 집에 가서 저녁밥을 짓겠다고.
소년의 이름은 강제규. 고등학교 1학년 봄부터 정규 수업 마치고 집에 와서 식구들의 밥상을 차렸다. 날마다 장 보고 요리하고 레시피 노트 쓰는 게 재미있다고 했다. 영화나 책에서 본 음식을 곧잘 따라 하고 자기만의 레시피를 개발하더니 한식, 일식, 양식 자격증도 땄다. 9개월간 주 3일씩 식당에서 알바한 돈으로 오사카, 교토, 도쿄로 미식 여행을 다녀왔다.
<소년의 레시피>의 소년은 자라서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이 뭐예요?"
"강제규는 지금 뭐 해요?"
<소년의 레시피>를 읽은 청소년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두 가지다. 시골에서 '소를 사랑하는 어린이'로 자란 나는 소처럼 풀을 먹을 수 있다. 제규가 제철 채소로 해준 샐러드와 서양식 가지 요리를 좋아했다. 제규가 옆구리 터지지 않게 롤 돈가스를 만들었다며 환호하던 새벽에 나도 덩달아 기뻤다. 시간이 문제였다. '모닝 육식'은 모성의 힘으로도 불가능했다.
대학 안 간다고 선언했던 강제규는 글로벌조리학과에 진학해서 '빡공(빡세게 공부)', '빡겜(빡세게 게임)', '빡요리(빡세게 요리)'를 했다. 스무 살의 유일한 후회는 자취하지 않고 통금 시간을 지키며 기숙사 생활한 것. 1학년 마치고 해병대에 가고 싶었던 제규는 척추측만증 때문에 소방서의 사회복무요원이 되었다. 화재 예방과 심폐 소생술 홍보를 하러 다니고, 20kg 나가는 기계를 들고 관내 모든 119안전센터를 소독했다.
제규는 본 소방서에서 집과 가까운 119안전센터로 발령받았다. 주간에만 구급 출동이 9건 넘게 있을 정도로 바쁜 센터에 출근한 지 나흘째. 센터 직원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이모님'이 출근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배달음식 메뉴를 정해야 하는 순간, 나서는 걸 싫어하고 낯을 많이 가리는 스물두 살 청년 강제규는 용기를 냈다.
"반장님. 혹시 괜찮다면, 제가 점심을 준비해도 되겠습니까?"
소방서는 보고가 생명이라고 한다. 반장님(소방사, 교, 장까지 통틀어서 반장. 소방위 이상부터 주임, 경력이 오래된 장 혹은 위가 보조 인력 지도관을 맡는다)은 팀장님에게 보고하고 승낙을 받았다. 주간 야간 합쳐서 20여 명 넘는 소방관들의 점심과 저녁 식비는 통틀어 5만 원 선. 제규는 영양을 고려하면서도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했다.
119안전센터 직원들은 제규가 밥하는 날을 '특식' 먹는 날이라고 즐거워했다. 돼지 앞다리살 수육, 마파두부, 돼지간장조림과 깻잎장, 놀래미회와 매운탕, 콩나물국, 쫄면, 김치찌개, 보쌈과 비빔칼국수, 깡통햄 버섯야채볶음, 탕수완자, 고추장삼겹살, 삼계탕, 간장 닭갈비와 삼계죽 등을 차려내는 사회복무요원 강제규는 소방관들에게 사랑받았다.
전역하고 나니 복학이 100일쯤 남아 있었다. 곰도 사람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식당 대표님들에게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석 달 일하고 복학해버릴 청년을 고용하는 게 가게 운영에 보탬이 될 리 없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제규는 한 건에 얼마씩 받는 배달 알바를 했다. 나는 성인 아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다.
"강제규, 글 써."
"내가 무슨 글을 써요?"
"사회복무요원 체험수기 써서 특별휴가 3일 받았잖아. 그거 굉장히 잘 쓰는 거야. 그러니까 119안전센터에서 밥한 거 써 봐. 대한민국에서 그런 이야기 쓸 사람은 너밖에 없어."
스마트폰 메모장에 쓴 글
제규는 움직이지 않았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출판계약서 쓰면 입금되는 선인세처럼, 나는 제규 통장에 돈을 꽂아주었다. 여전히 제규는 나가서 돌아다니거나 노트북을 켜지 않고 침대에서 뒹굴었다. '아니, 쟤는 왜 돈을 받고서 누워 있어?' 나는 구시렁거렸다. 본전 생각이 나서 제규 방문을 확 열었다. 제규는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동영상을 보는 게 아니었다.
와! 침대에 누워서 엄지손가락으로 글을 쓰는 신인류가 내 아들이었다. 스마트폰 메모장에 쓴 글은 꾸밈없이 진솔했다. 제규는 소방서의 보조 인력. 대응 1단계인 큰 화재가 났을 때 이틀 동안 현장에서 소방관들을 보조했다.
춥고 축축하게 지낸 이야기에 짜증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돌아와 방화복을 빨고 구조대 차량을 청소하면서 슬며시 마음이 바뀌는 게 보였다. 헛된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라 소방관을 돕고 있다고 자각한 모양이었다.
제규가 119안전센터에서 밥하겠다며 용기를 내는 순간에는 울컥했다. 음식을 어설프게 하고 싶지 않은 제규 마음도 느껴졌다. 가정집 가스레인지에 업소용 대용량 솥을 쓰는 센터 주방에서 잠깐 고민한 제규는 돼지 앞다리살 수육을 만들었다. 출동벨 울려서 그대로 뛰쳐나간 구급대원들이 돌아와서 컵라면을 먹지 않게 남은 음식을 따뜻하게 보관했다.
구급 반장님이 출산 휴가 들어간 날에는 구급대 자리가 비어서 제규도 같이 출동했다. 고독사 현장이었다. 젊은 반장님이 보조 인력을 보호하려고 "나가! 제규야, 눈 가리고 나가!" 소리쳤다는 문장을 읽을 때 나도 같이 거기에 있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시취를 맡고 시신을 본 제규는 귀소해서 믹스커피를 마시며 알았다. 달달하고 뜨끈한 인스턴트 커피는 소방관들의 마음을 즉각적으로 달래주는 '특식'이라는 것을.
밤새 큰 화재가 2건이나 일어난 다음 날, 센터에 출근한 제규는 탄내가 확 풍기는 방화복을 소형차 크기의 방화복 전용 세탁기 앞으로 가져갔다. 무전기와 장비를 꼼꼼하게 챙기고, 방화복의 외피와 내피를 분리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외피에 걸려 있는, 이름과 계급이 적혀 있는 인식표를 떼 내서 세탁하는 장면은 글을 다 읽고 나서도 잔상으로 남았다.
젊은 반장님들과 센터장님의 개성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화재 현장에서 임무를 마치고 귀소할 때는 반장님들도 보통의 청년들처럼 좋아하는 게임, 음악, 음식 이야기를 나눴다. 지친 모습으로 커다란 케이지에 유기견을 잡아 오던 도급 담당 반장님은 쉬는 날 바다에서 놀래미를 잔뜩 잡아 센터로 가져와서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온갖 일을 다 겪어온 센터장님은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자기 디스'를 하며 제규에게 다가왔다. '2메다 조곰 안 되는' 키 덕분에 머리 벗겨진 게 안 보인다고. 사회복무요원의 유니폼을 매만져준 센터장님 덕분에 제규는 형들 같은 반장님에게도, 주방에서 일하는 '이모님'에게도 배우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식재료를 계량하지 않고 맛있게 요리하는 이모님은 "음식하는 사람이 가장 맛난 거 시식하는겨"라면서 꼭 제규에게 먼저 먹여주었다.
"엄마, 이 글 다 썼는데 어떡해요?"
'119안전센터 특식 일지'를 쓴 제규는 물었다. 책이 될 가능성은 낮다. 그래도 나는 엄마, 낙관하며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올리라고 했다. 운 좋게도 책나물 출판사 김화영 편집장님의 눈에 띄었고 출판계약으로 이어졌다. 나는 스물다섯 살에 결혼했는데, 제규는 스물다섯 살에 <소방관들을 위한 특별한 한 끼>를 펴낸 사람이 되었다.
5만 원으로 분투하는 요리사의 마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그렇다. 고등학생 아들이 차려주는 밥을 먹은 어머니로서 되갚아야 할 시간.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강제규 작가 신간 이벤트를 열고, 중고등학교로 <소년의 레시피> 강연갈 때 <소방관들을 위한 특별한 한 끼>를 선물로 가져갔다.
블로그나 SNS에 제규 책 이야기가 나오면 암기하듯이 중얼중얼 계속 읽었다. 요리하는 남자인 이화여대 로스쿨 서을오 교수님은 <소방관들을 위한 특별한 한 끼>를 읽고 이렇게 쓰셨다.
"책 속에 등장하는 요리들이 마치 살아 숨 쉬는 것 같습니다. 요리의 과정, 요리 방법이 안전센터의 숨 가쁘게 돌아가는 업무와 어우러져서, 소방관을 위한 새로운 요리들이 탄생했습니다. 힘든 소방관들을 위해서 5만 원이라는 예산을 가지고 분투하는 요리사의 마음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소년의 레시피>를 펴낸 지 6년. 입시 공부 대신에 하고 싶은 요리를 하던 때처럼 제규의 미래는 불안하다. "하루 10시간 서서 일해도 10년 차 연봉이 3,000만 원. 내 가게 차릴 엄두도 못 내" 고등학생 제규가 레시피 노트 맨 앞장에 붙여놓은 신문 스크랩의 상황에서 크게 달라진 건 없다. 그래도 제규는 우직하고 재미나게 자기만의 이야기를 쌓아가고 있다.
SBS 라디오 <김선재의 책하고 놀자> '김혼비의 취향 독서'에서 김혼비 작가님은 다른 길을 가는 청소년의 이야기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불안함을 안고서도 원하는 길을 걸어간 소년들의 그 이후가 책으로 나오는 건 드물다고, 심지어 본인 등판했다며 <소방관들을 위한 특별한 한 끼>를 반가워했다.
그리고 이런 분들에게 추천했다.
첫째, 요리에 관심 있으신 분들.
둘째,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간단한 식재료로 특별한 요리를 하고 싶으신 분들.
셋째, 넷플릭스 <사이렌:불의 섬>을 보고 소방팀에 애정이 있으셔서 소방서의 향취를 느끼고 싶은 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