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성인이 된 우리 애의 왼쪽 볼에는 아주 작은 상처가 있다. 유치원 때, 친구와 싸우다가 긁힌 상처다. 유치원 선생님께서 미안해하셔서, 아내가 괜찮다고 말씀드렸던 적이 있다. 언젠가는 유치원 선생님께서 아내에게 전화하셔서 하소연하시기도 했다. '아이가 너무 활발해서 힘들다'는 말씀이었다. 아내는 죄송하다는 말씀과 함께 집에서도 장난이 심한 아이가 유치원에서 친구들과 잘 지낼 수 있도록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다.
벌써 30여 년 전 이야기다. 당시엔 나뿐만 아니라, 대개 이런 모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은 자녀가 하나 또는 둘인 가정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생각도 강해졌다. 피해나 권리침해에 대해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있고, 전투적으로 대응하는 정서도 강해져 있다.
오래전 학교폭력의 기억은 이렇다. 아이가 반에서 친구하고 싸웠는데, 머리에서 피가 약간 났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학교폭력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이 생긴 것이다. 그 당시에는 가해 학생이 집에 오면, 부모님들이 "이 녀석아, 친구를 때리다니"라며 호되게 야단을 쳤다. 반대로, 피해 학생이 울면서 집에 오면, 부모님이 "친구하고 싸우기도 하고 조금 다치기도 하는 게지, 그만한 일로 울고 그러느냐"라고 하곤 했다.
물론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결여돼 있던 옛날이야기다. 실제로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는 학교폭력 사건도 많았다.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꾸준히 높아진 것은 한국이 더 나은 사회가 됐다는 방증이다.
이젠 다른 측면도 살필 때가 됐다. 실제 학교 폭력 사안 가운데는 아이들이 감당할 만한 경미한 사례도 있다. 이런 경우까지 지나치게 예민하게 대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때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라떼는 말이야'라며 과거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세태에 따른 새로운 문제도 살펴야 한다. 서이초 사태로 드러난 일부 학부모들의 공격적 민원이 대표적인 사례다.
합리적 행동이 낳은 비합리적 결과
일부 학부모들은 1~2명뿐인 '금쪽이 같은 내 새끼'가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에, 또 너무도 안전하지 못한 환경 때문에, 그리고 가끔 들려오는 심상찮은 학교폭력과 학대 이야기를 듣기 때문에, 아주 작은 사건에도 공격적 항의로 대응한다. 일단 공격적 대응을 기본으로 한다.
문제는 학부모들의 일견 '합리적' 행동이 그들의 의도와 달리 교사가 정당한 교육과 생활지도마저 포기하는 '비합리적' 결과를 낳는다는 점이다. 물론 극히 일부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광화문에 모인 수십만 교사들이 서이초 교사의 고통이 남의 일이 아니라고 외쳤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른바 '내 새끼 지상주의'가 내 아이는 '금쪽이'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극단적 자기중심주의로 이어지고, 결국 교사의 교육 포기를 낳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개인의 일견 합리적 행동이 결과적으로 비합리적 결과를 낳는 역설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소가 오늘의 학교 교실이다.
학부모라면 누구나 제 아이가 남을 배려하는 바른 인성을 가진 아이로, 집단적 관계에서 소통 능력과 사회성을 갖춘 사회성 좋은 아이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일부 악성 민원인 학부모가 신고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교사들이 정당한 생활지도마저 포기한다면, 학부모들의 바람은 실현될 수 없다.
물론 구조적 배경도 있다. 요즘의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는 교육과 돌봄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과거와 달리 지금의 학교는 좁은 의미의 교육 외에 급식, 돌봄, 방과후학교, 위(Wee) 센터, 위(Wee) 클래스 등 심리 정서적 지원까지 다양하게 그 역할이 확대되어 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는 다르지만,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의 학부모는 좁은 의미의 교육뿐 아니라, 돌봄과 심리 정서적 지원까지 아우르는 모든 것을 교사에게 요구한다. 더구나 예전에는 가정의 역할이었던 인성교육이 요즘은 가정에서 거의 이뤄지지 않은 탓에, 학교와 교사의 부담은 더욱 증폭돼 있다.
그 때문에 학부모가 교사에 대해 민원을 제기하고 불만을 표할 영역이 확장돼 있다. 학부모는 아이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받던 지원을 초등학교에서도 받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따라서 기대와 현실의 간극이 생긴다. 최고의 역량을 가진 지금의 교사들이 예전 교사보다 쉽게 소진되는 이유다. 또 악성 민원에 희생당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최근 전국교대생연합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680명 가운데 51.1%가 "서이초 사건 후 무력감과 불안감으로 다른 진로를 고민하게 됐다"고 밝혔다. 일부 학부모들의 무리한 민원 역시 대개 선의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젊은 교사들의 의욕 상실이다. 결국 피해는 아이들이 입는다.
교육청도 반성할 점이 있다
나도 교육행정책임자로서 자성하는 부분도 있다. 학부모 민원 처리 방식이 교사들의 무력감을 키웠다는 자성이다. 통상적인 교육청의 방식은 이렇다. 일단 민원이 제기되면, 민원이 없는 상태, 즉 민원의 조용한 해결을 최고의 기준으로 두고, 민원을 조사하고 처리 방식을 고민한다. 그러다 보면 민원 자체는 일단 정당하다고 전제하고, 민원을 일으킨 교사를 잠재적 '죄인'으로 설정한다. 애초 민원이 없는 상태가 바람직하다는 전제가 있었던 탓이다. 그리고 이런 전제하에서 조사와 점검을 진행한다.
물론 교육청의 역할 역시 과거처럼 군림하는 기관이 아니라 학교와 교사를 지원하는 기관으로 변화해 왔다. 하지만 민원 처리 행정에 관한 한, 교사를 잠재적 죄인으로 전제하는 행태가 유지돼 왔다. 여기서도 일종의 역설이 발생한 셈이다.
물론 이는 시대적 변화의 반영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가 지난 30여 년 동안 민주화 개혁 과정을 거치면서, 관(官)의 고압적 태도를 불식하고 주민 친화적 행정을 강조하게 되고, 그것이 공공기관의 민원 서비스를 평가하는 기준에도 반영됐다. 예컨대 민원인이 얼마나 만족하는가, 반복 민원이 얼마나 적은가, 민원을 얼마나 더 많이 해결했는가 하는 등의 기준이 설정돼 있다.
그러다 보니 학부모 민원의 질적 성격이나 정당성 등에 대한 고려보다는, 민원의 조용한 해결, 민원 발생 빈도의 축소 등을 지향하게 된다. 당연히 학교 민원에도 이런 흐름이 나타난다. 민원을 제기하는 학부모와의 관계에서 교사가 옥죄게 된다.
민주화 이후 관의 긍정적 변화를 악용하는 악성 민원인은 사태를 더욱 악화한다. 얼마 전 자녀의 '부회장 당선 무효'에 불만을 가진 한 학부모는 8건의 행정심판, 국민신문고 제출 민원 24건, 정보공개 29건을 제출했다. 관의 군림하는 태도를 불식하고 주민친화적 행정을 촉진하고자 마련된 법 제도가 극단적인 자기중심적 민원과 항의의 도구로 악용되는 사례다.
광화문에서 한 교사는 "민원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오는 인격 모독, 인격 살인을 적극적인 고발을 통해 처벌까지 이뤄지도록 해주십시오"라고 절규하기도 했다.
공격적 문제 행동을 둘러싼 교실 풍경
교사의 위기를 만들어내는 교실의 또 다른 풍경을 보자. 공격적 문제행동을 하는 학생이 있다고 하자. 그 학생의 학부모는 그 모든 것이 관용되고 문제적 행동을 하더라도 철저하게 자신의 자녀가 존중받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기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다고 느낄 때, 강력한 민원 제기자와 항의자가 된다.
그런데 교실에서는 한 아이의 폭력적 행위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시퍼렇게 질려 공포에 떨게 된다. 이때 두려워 떠는 학생의 부모들은 "왜 우리 아이가 부당한 문제행동에 노출돼 피해를 입어야 하는가. 선생님은 무엇을 하는가"라며 정반대 방향의 민원과 항의를 제기한다. 한 민원이 또 다른 민원의 출발로 이어지는 것이다. 한 아이의 문제 행동에 대한 관용은 다른 아이들의 유사한 문제행동 및 방종으로 이어져 교실에서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지게 된다.
우리는 지난 20~30년 동안 독재하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존중받지 못했다는 자각 위에서 자유와 권리를 확대하는 것을 선으로 생각해 왔고, 그것을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해 왔다. 반면에 나의 자유와 권리를 향한 행동이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혹여 침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 나의 자유와 권리가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위치 지워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다.
바로 이런 모순적 상황에 교실과 교사가 처해 있음을 학부모들이 인식해야 한다. 금쪽같은 내 새끼만을 중심에 놓는 행동이 결국 돌고 돌아 다른 학생들에게 그리고 궁극적으로 돌고 돌아 자신의 자녀 교육에도 피해로 돌아오는 악순환 말이다.
물론 모든 교실이 이렇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협력적이며, 많은 교실에서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매우 돈독하다. 그러나 이런 악순환이 일상이 되면서, 교실이 서서히 붕괴되고 그 부정적 효과가 다른 교실로 전염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오늘날의 교실 붕괴는 경쟁적 대입 환경 등 복합적 요인에 의해 발생하지만, 개인의 작은 행동이 모여 완성된다는 점에 우리가 시선을 둬야 한다.
새삼 되새기는 문장. '교사가 행복해야 학생도 행복하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교육이 자녀의 성장과 행복으로 가는 길이 되기를 바라는 학부모들에게 호소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 역설적인 모순적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광화문의 절규는 그런 현실이 단지 특수한 예외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교사가 행복해야 학생도 행복하다"는 말을 새삼 상기해야 한다. 교사가 행복하고 안전하게 수업할 권리가 보장돼야, 교사의 권위와 교육권이 온전히 보호되어야, 자녀의 성장과 행복을 위한 진정한 교육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를 위한 성찰적 인식과 전환이 필요하다. 자신의 합리적 행위가 초래하는 비합리적 결과에 대해서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어렵게, 과거의 권위주의적 학교를 민주적 학교로 변화시켜 왔다. 민주적이라고 할 때는 학교 내 모든 주체들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여러 주체들의 권리가 상호충돌하고, 어떤 극단적 주체는 법제도를 자신의 권리만을 위해서 악용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아동학대를 막기 위한 법제도를 명분삼아 교권을 침해하는 '내새끼 지상주의' 역시 하나의 선명한 사례다.
이제 이 민주적 학교 원리를 유지하면서도 더 나아가 공동체형 학교를 만들어가야 한다. 본시 학교는 교육을 목표로 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모두의 자유와 권리가 존중되면서도 그 핵심에 선생님의 권위 그리고 교육권이 철저히 보장되고 그 권위가 살아있는 공동체형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학교는 작은 사회이기 때문에, 나는 우리 사회 역시 권위주의적 사회를 넘어 민주적 사회로 전환돼 왔다면, 이제 그 성과 위에서 공동체형 사회를 만드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새삼스러운 표현이지만, 교육은 사랑이고 상호존중 위에 피어나는 꽃이다.
다양한 균열에도 상호 존중하는 협력적 문화를
민주적 학교의 또 다른 풍경도 있다. 학교에는 크고 작은 다양한 균열들이 있다. 외부에서 볼 때는 학교가 단일한 세계인 듯싶지만, 그 안에는 여러 직종들이 있다. 관리자격인 교장, 교감도 있고, 행정실에는 행정실장을 포함한 다양한 직원이 있다. 공무직이라 불리는 직원들도 있다. 민간기업의 비정규직과 달리 무기계약직으로 고용이 보장된 학교 공무직은 50-60개의 직종이 있다. 보통 3~4가지 종류에 그치는 다른 민간 기업과 대조적이다.
그리고 이들 직종은 대부분 잘 조직화돼 있고, 노동조합도 활발하다. 선생님들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등 학교 급별로 차이가 크다. 가르치는 과목에 따른 차이 역시 크다. 이런 차이는 다양성인 동시에 균열이기도 하다. 작은 일의 분담을 가지고 일상적인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하고, 집단화 된 갈등이 벌어지기도 한다.
과거 권위주의 학교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이런 균열과 차이를 억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를 차이와 다양성으로 인정해야 한다. 학생들에 대한 가르침을 과업으로 삼는 교육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모두가 존중받고 또 그 기초 위에서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협력하는 공동체형 학교를 만드는 과제가 중요하다.
학부모가 '내새끼 지상주의'에 충실하듯, 학교의 다른 주체들과 그 집단들은 '내 집단 지상주의' 관점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당연히 학부모에게 호소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자기중심주의를 넘어 공동체형 학교를 만들기 위한 고민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학생 인권을 둘러싼 논쟁도 이런 시각에서 보면,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는 식의 과거 회귀가 아니라, 민주적 학교 시대에 이뤄진 발전을 전제하고, 그 위에서 교사의 교육권이 존중받고 더 나아가 모든 주체들이 교육을 위해 협력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미래로 가야 한다.
한국 사회는 세계가 부러워하듯, 원조 받는 나라에서 원조공여국으로 변화하였으며, 2차 세계 대전 이후 후진국을 탈피하여 선진국이 된 아주 드문 사례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달성한 예외적인 나라다.
그런데 이런 성공은 '문제의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로 이어진다. 빈곤, 결핍, 권위주의적 억압, 인권 경시 등 후진국형 문제의 소멸인 동시에, 우리가 지금 직면하는 것과 같은 선진국형 문제의 도전이다. 서이초 사태 이후 드러난 학교의 위기는 우리가 바로 이런 새로운 문제에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대면 위에서 우리는 새로운 선진국형 학교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선진국의 그늘을 직시하면서 한국적 독창성을 결합한 한국적 선진국형 학교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그래서 학부모들에게 다시 한 번 호소하고자 한다. '선생님을 믿어주세요'라고. 지금이라도 선생님의 권위를 다시 세우는 대전환의 여정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자부심을 갖듯, 대한민국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교육입국(敎育立國)'의 나라다. 교육으로 나라를 세운 것이다. 다시 말해, 교육이 흔들리면 나라가 흔들린다. 그 교육의 흔들림은 선생님의 권위와 교육권이 흔들릴 때 나타나는 것이다. 교육이 흔들리고 있다는 인식을 지금이라도 학부모들이 가져주시기를 소망한다.
이제 대한민국을 다시 세운다는 생각으로, 처절하게 선생님의 교육권을 다시 세우는 노력에 우리 모두가 힘을 보태야 한다. 모두가 존중받는, 그러나 교육이 중심에 서는 공동체적 학교를 향해 함께 가자고, 나는 간곡히 호소한다.
돈 받고 하는 일 외에, 돈 내고 하는 일을 아이들이 갖게 하자
지난 9월 23일에는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사)한기범희망나눔'이 주관하는 '희망농구올스타' 자선경기가 열렸다. 전 농구스타 한기범 선생님이 주관해서, 심장병 어린이, 다문화 학생들을 후원하기 위해 매년 열리는 행사다. 현 농구스타들이 자발적으로 출연한다. 이날 환영사에서 그리고 다른 많은 자리에서 반복해서 드렸던 말씀이 있다. 학부모들에게 당부 드리는 말씀이다.
"자녀들이 안정적으로 돈 많이 받는 직업을 갖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십니다. 그에 더해서 우리 학생들이 '돈 내고 하는 일'을 하나 갖도록 해주십시오."
내가 대학에 있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종종 했다.
"여러분들은 이제 대학을 떠나 직장을 잡을 것입니다. 그것은 돈 받고 하는 일입니다. 가급적 돈 많이 받는 직업을 찾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것으로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동시에 돈 내고 하는 일을 하나 찾으십시오. 돈 내고 자신의 시간을 쪼개고 헌신할 때 여러분은 행복을 느낄 것입니다. 왜냐고요. 신이 인간을 그렇게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산업화 시대에는 우리 모두가 더 잘 살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덕담이고 미덕이었다. 민주화 시대에는 독재 하에서 억압된 자유, 권리 그리고 부당하게 침해된 개개인의 이익을 되찾고 확대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당연히 우리는 모두가 잘 살고, 모두가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국가에 의해 보장받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확대되고, 개개인이나 소속 집단이익이 극대화되는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동시에, 타인을 위해서,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서, 때로는 자기 것을 희생하는 미덕이 필요할 수도 있다. 나의 권익만이 아니라 타인의 권익을 위해 양보하는 미덕, 나와 가족만이 아니라 공동체를 생각하는 미덕이 필요할 수 있다. 본시 사회는 모든 개인이 모여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동체적 학교와 사회는 아마도 그런 미덕 위에서 꽃피울 것이다.
광화문 1차 집회에서 한 선생님은 이렇게 외쳤다.
"교육은 사랑입니다. 아이들을 사랑할 기회를 주십시오!"
이제 우리 모두 공동체적 학교를 향한 여정을 시작하자. 모두가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이 새로운 과제를 위해 우리 모두가 지혜를 모으자. 정답이 없는 이 여정 위에서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조희연 기자는 서울시 교육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