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을 바라다보는 언덕에 자리한 명례성지(경남 밀양시 하남읍 명례안길)는 건축 양식이 판이하게 다른 두 개의 성당을 품고 있다.
하나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복자 신석복 마르코를 기념하는 성당으로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하여 2018년에 봉헌되었다. 또 하나는 1896년 경남 지역에서 최초로 세워진 명례성당을 복원한 한옥 성당(경남문화재자료)으로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운 좋게도 지인 덕분에 올 들어 몇 차례 이곳을 방문할 수 있었는데, 지난 12일에도 그 기회가 또 내게 찾아왔다. 늘 그렇듯이 설렘과 떨림으로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 20분께. 천주교 마산교구 최진우 아드리아노 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복자 신마르코 순교자 기념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금장수 신석복 마르코의 삶과 순교를 기리다
신석복 마르코 기념성당은 우뚝 솟은 모습이 아니라 순교복자의 생가 터, 순교탑, 그리고 12개의 소금 형상 조형물 아래쪽에 마치 녹는 소금처럼 땅속으로 녹아드는 형상으로 지어졌다. 소금장수였던 순교자의 이미지에 걸맞게 외벽도 채색하지 않아 오히려 더 감동이 밀려왔다.
복자 신석복 마르코는 명례에서 진해 웅천을 오가며 소금과 누룩 행상을 했다. 살림도 넉넉했다. 그는 남몰래 복음을 전하면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숨어살던 신자들을 돕기도 하고, 천주교의 실정을 그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소금과 누룩 행상이 생계 수단이기도 했겠으나, 천주교 박해 시대에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장사를 핑계 삼아 다녔을 것이다.
웅천 장터에서 돌아오던 나루터에서 포졸들에게 붙잡혀 대구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그의 몸값으로 포졸들이 80냥을 요구했다 한다. 형제들이 그를 집으로 데려오기 위하여 급히 돈을 구해 포졸들에게 전달하려 했지만, 그는 "나를 위해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마라" 하며 순교를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고,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성전 제대 왼쪽에 위치한 부활경당에 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성모승천성당서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흔적을 보다
미사 후 맛있는 점심을 먹고서 오랜 세월의 멋스러움이 느껴지는 한옥 성당에 들렀다. 원래 성모동산 부지에 있었으나 태풍으로 유실되어 1928년에 지금 자리로 옮겨왔다. 안타깝게도 1936년 태풍으로 또 전파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두 번의 태풍에도 나무로 된 성모상이 깨지지 않고 금도 가지 않은 채 잘 보존되어 있는 것에 신자들이 희망을 얻었다 한다. 그래서 무너진 성당의 잔해를 이용해 규모를 축소 복원하여 1938년에 성모승천성당으로 봉헌하였다.
성전 내부에는 기둥 좌우로 남녀가 따로 앉게끔 자리가 구분되어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작은 성당인데도 바깥으로 통하는 문이 무려 네 개나 있어 궁금증이 일었는데, 남녀뿐만 아니라 어른과 어린이들이 출입하는 문도 달랐다고 한다.
이곳 초대 주임으로 1897년에 부임한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는 김대건 신부, 최양업 신부에 이어 1896년 서울 약현성당에서 강도영, 정규하 신부와 함께 사제품을 받은 분이다. 더욱이 우리 한국 땅에서 거행된 첫 사제 서품식이란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그는 1903년 37세로 선종할 때까지 여기서 사목했다.
소금장수였던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삶과 순교를 기리는 명례성지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 그의 삶을 본받아 세상의 소금으로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사색하게 하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