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를 재배한다는 사실을 마냥 신기해 하자 지인은 쑥쑥 잘 자라고 까맣게 후추가 열린다며 심어보라고 권했습니다. 봄 파조기를 맞아 부푼 기대를 안고 텃밭에 욕심껏 심었습니다. 발아율도 좋고 성장도 눈에 띄게 쑥쑥 잘 자랐습니다.
짙은 자주색 줄기에 빤딱빤딱 광이 나는 짙은 녹색의 무성한 잎은 후추 결실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였습니다. 주변 지인들에게 얼마나 자랑하고 소문을 많이 냈는지 모릅니다.
독특한 모양의 진분홍색 꽃이 피니 그 기대감은 더욱 커져 갔고 까만 후추에 대한 조바심마저 들었습니다. 가을, 드디어 까맣게 후추(?)가 익어가기 시작했고 코를 대고 후추 냄새를 갈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런 냄새가 안 났습니다. 아직 기다림이 필요한가 싶었습니다.
잘 익은 후추를 골라 따서 말려 봅니다. 하루 이틀... 아직 아닌가... 더 기다려 봅니다. 바짝 말랐는데도 냄새가 안 납니다. 조금씩 정체가 의심되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분명 후추가 맞다고 했으니 스스로 위안하며 가루를 만들어 봅니다. 마지막 기대마저 져버립니다. 이건 후추가 아니다. 그럼 넌 도대체 누구냐?
폭풍검색 결과 이 후추(?)의 정체는 중국 황실에서 먹던 채소 황궁채였습니다. 다행히 먹는 채소일 뿐 아니라 영양 만점의 고급 채소랍니다. 시금치보다 칼슘이 최고 45배, 철분과 비타민A도 8배가 많고 위에 좋다는 뮤신도 풍부하다고 합니다.
두툼하고 광택이 나는 잎사귀는 뮤신 성분으로 살짝 미끈하기는 하나 달큰한 맛이 나면서 아삭아삭해서 쌈채로 손색이 없습니다. 고급 쌈밥집에서 쌈채로 나온다고 합니다.
꽃도 생으로 초장에 찍어 먹습니다. 또 잎사귀는 데쳐 나물로 무쳐 먹거나 된장국을 끓여도 좋습니다. 가을에는 붉게 단풍이 들기 때문에 잎이 푸르를 때 따서 냉장고에 보관해 두고 먹어야 합니다.
결국 봄부터 가을까지 긴 시간 애정을 기울인 후추는 아니었지만 뜻밖의 황궁채라는 영양 많고 별미인 새로운 채소를 만났습니다.
사실 까만 열매는 후추로 오인할 만합니다. 지인도 당연히 후추로 알고 냄새 한번 맡아보지 않았고 돼지고기 삶을 때 넣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