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정읍에 이어 이번에 꽃담 여행을 할 곳은 전라북도 장수다. 시인 안도현의 <무진장> 시처럼 눈이 오면 무진장 오는 심심산골이다. 해직교사로 있다가 장수 산서고등학교에 새로 부임한 시인은 덕유산을 떠받치고 있는 무진장 고을, 무주 진안 장수에 대한 감상을 간단명료한 시로 남겼다.
무주 진안 장수
눈이 온다
무진장 온다
한없이 외지고 궁벽했을 이런 곳에 뭐 볼 만한 꽃담이 있을까마는, 일찌감치 이곳에 들어온 유가(儒家), 선비들은 집을 꾸미는 데 있어 저마다 미적취향을 충분히 발휘해 훌륭한 꽃담을 구현해 놓았다. 이는 역설적으로 심심산골이기에 가능한 꽃담의 변방성에 기인한다. 변방성은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골 가장자리에 있어서 나타나는 성질이다.
변방성은 변화의 동력, 변화의 시작이다. 심리적으로 임금에 대한 불충의 강박에서 벗어나게 하며 흔히 집성마을에 나타나는 타인에 대한 배려의 윤리관이나 스스로 몸을 낮추는 겸손과 같은 유학적 덕목을 지키려는 굴레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한다.
꽃담에 관한한 전북 장수는 꽃담고을로 불리는 괴산과 흡사하다. 두 고을 모두 깊은 산골 고을로 유교적 자취가 남아있는 산간마을 곳곳에 꽃담이 펼쳐있다. 장수의 꽃담은 산서면 권희문가옥의 안채 벽체, 정상윤가옥의 담과 합각, 번암면 장재영가옥의 사랑채 담과 안채 합각, 장재영가옥 근처에 있는 어서각(御書閣)에서 발견된다.
안동권씨 장수 오메마을 들어서니
장수읍 군청 앞 음식점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비행기재를 '구불텅구불텅' 넘어 가고 있다. 군내버스 뒤를 쫓아 산서면에 있는 권희문가옥에 가고 있는 길이다. 해발 471미터, 비행기재 꼭대기에 서니 골 깊은 산 아래 펑퍼짐한 함지땅이 펼쳐 있다. 산서면이다. 서로 향해 넘실대는 서산마루는 점잖고 산기슭에 점점 박힌 집들은 잠잠하다.
담헌 권희문가가 대대로 살아온 곳은 산서면 오메마을이다. 오랫동안 여기에 살붙이고 살아온 마을사람들이 마을회관 앞 돌비석에 마을에 대해 자세하게 밝혀 놓았다.
"영대산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를 담고 칠봉산에 서린 정기를 받으면서 드넓게 펼쳐진 들판을 끼고 그 동편에 아늑히 자리한 이곳은 좌우로 안산이 마을 전면을 비호하고 있어 예로부터 길지로 인정하는 곳이다. 이곳에 취락의 역사가 시작된 지는 사백여년을 거스를 수 있는데 (...) 예로부터 전통적으로 유교를 숭상하던 이곳은 그만큼 개화도 늦었지만 한편으로는 타 지역에 비하여 전통적인 예의범절과 미풍양속이 면면히 전해오는 곳으로...(후략)"
안동권씨 권희문(1916-2008)의 선조가 이곳에 정착한 시기는 담헌의 12대조 권인이 한양 남산 밑 주동에서 이거하여 정착하면서 부터다. 권인은 권상의 넷째아들로 임란 시 왜구토벌에 참전한 권협, 권희와 형제간이다. 권인은 광해군의 사화를 피해 관직을 버리고 정착하였다. 경남거창 현감으로 한양을 오르내릴 때 이곳을 눈여겨본 것이 인연이 되었다 한다.
권희문은 9대조 화산 권숙(1655-1716)이래 5대조 권한(1795-1843), 고조 비헌(1827-1895), 증조 야옹 권윤수(1837-1876), 조부 권승규(1865-1943), 아버지 권영근(1893-1958)에 이르기까지 선조들의 유맥을 이어받아 사상과 철학을 형성하였다. 유년기에는 증조에게 사사하고 성장기에는 곡성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 분암 안자정(1880~1957)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집주인 심성을 드러낸 현판 '억왕서'
장수의 고택 가운데 조선후기의 권희문가옥(1773)과 장재영가옥(1856), 일제강점기의 정상윤가옥(1938)은 부농가의 특성을 보인다. 조선후기 부농고택인 정읍의 김명관고택(1784)이 마스터플랜을 갖고 10년에 걸쳐 단번에 건축되었다면 권희문가옥은 200년에 걸쳐 중수를 거듭한 끝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담헌의 6대조 권창언(?-1786)이 짓기 시작해 1773년(영조49년) 사랑채를 상량하였다. 한집안을 일으키는 중추적 역할을 하는 선조가 있기 마련인데 권희문 집안은 그 역할을 담헌의 증조가 맡았다. 증조는 1875년 사랑채를 중수하고 1886년 안채를 건립하여 가옥의 기본 뼈대를 이뤘다. 이후 담헌은 1969년 재차 중수하고 1973년 문간채를 건립했다.
증조는 산림에 묻혀 자적한 분으로 담헌의 심리이상을 구현해나가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랑채를 억왕서(嶷汪棲)라 하여 자신의 사상과 철학, 미적이상을 내보였다. 억왕(嶷汪)은 높고 깊은 산과 휘돌아가는 물을 뜻하고 서(棲)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증조는 금강의 발원지 뜬봉샘(장수읍 수분리 소재)에서 시작하는 물줄기가 길게 휘돌아 큰물이 된다는 장수(長水)의 의미를 염두에 두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산 깊고 물 긴 장수에 몸을 기대 자적하며 살고자하는 이상을 내비친 것이다.
'서(棲)'의 개념은 산과 물, 자연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과거 사랑채는 이곳을 지나는 과객의 숙소나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하니 이웃과 함께 살아가고자하는 착한 심성, 선으로 확장된다. 선은 미와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착한 심성은 이 집안을 꾸미는 미적 취향의 바탕이 된다.
권희문가옥이 국립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지정한 한국의 민가정원 중 하나로 당당히 이름이 올라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一자형 사랑채와 ㄱ자형 안채, 서쪽채로 이루어진 네모난 안채 마당은 비워둔 채 사랑채 앞과 안채 후원에 화단을 조성하여 온갖 나무와 꽃을 심어 가꾸었다.
이는 자연을 집안에 가두려는 사유욕의 발로라기보다는 자연을 가까이 두고 계절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변하는 자연의 조각과 순간을 감상하려는 미적 심성을 드러낸 것이다.
꽃담이 안채 벽체를 꽉 채웠다
집주인의 미에 대한 동경, 미적 심성을 가장 잘 드러낸 대목은 안채 벽면에 새긴 꽃담이다. 모두 네 군데에서 발견된다. 먼저 중문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남쪽 날개벽체에 하나, 동쪽 오른쪽 끄트머리 벽체, 북쪽 왼쪽 끝, 서쪽벽체에 각각 하나씩 있다. 동서남북 하나씩, 안채 4방면에 꽃담을 쌓아 안채를 밝혔다.
중문을 통해 보이는 꽃담은 집주인의 꽃담이라기보다는 집 안에 드는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집 안에 들어오는 모든 이의 복과 건강을 기원하고 있다. 암키와를 사용해 세 송이 연꽃 모양을 만들고 연꽃문양 사이에 새싹무늬 위에 'ㅃ'자 모양의 무늬를 새겼다. 그 위에는 점선무늬를 넣었다.
싹이 돋고 꽃봉오리를 잉태하는 자연의 이치를 동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고백하고 있다. 연꽃은 세상풍조에 연연해하지 않는 고고한 군자를 의미한다. 유맥으로 형성된 사상과 철학을 사랑채에는 난과 매화의 그림판으로, 안채에는 연꽃 꽃담으로 아로새겼다.
꽃봉오리 사이에 낀 'ㅃ' 모양의 특이한 무늬를 두고 어떤 이는 복(福)자를 거꾸로 새긴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아무리 보아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복주머니나 새싹 위에서 영글어 가는 열매 정도로 보인다. 종부와 손자에게 물어보았으나 이에 대한 답은 얻지 못하였다. 아무튼 여기 오는 모든 이는 복을 받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덧붙이는 글 | *억왕서 현판 : 대부분 자료에는 ‘의왕서’라 되어 있으나 ‘산 높고 물 맑은 곳에 깃들인다’는 의미이므로 억왕서라 읽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전통문화포털>에서 소개하고 있는 권희문가옥 한자기록물에 ‘嶷汪棲’ 현판은 억왕서라 되어 있다.
*담헌 권희문가와 억왕서의 개념은 <조선후기호남지방양반가옥의 심미경계고찰- 전북 장수의 권희문가옥을 중심으로>를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