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1년 6개월 동안 정치가 마비되고 경제와 민생이 추락하면서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파국의 위기에 직면하지 않은 이유는 한반도 안보상황이 비교적 안정됐다는 점에 있다.
만일 동북아시아에서 분쟁이 일어난다면 대만해협이 될 것이고, 한반도가 당장 대만해협보다 위험하지는 않다는 게 일반적 전망이었다. 북한에 극도로 강경한 윤 정부가 출범했음에도 북한은 남한에 대해 "서로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게 소원"(2022년 9월)이라며 거리두기를 해왔다.
지난해 12월에 북한의 무인기가 남한 영토를 침범하고 탄도미사일이 울릉도와 포항 근처의 공해에 탄착된 사례가 엄중한 남북관계의 현실을 일깨우기는 했지만 한반도 정전협정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유지된 편이다. 남북 9.19 군사합의서로 말하자면 북한이 합의를 수시로 위반해 "이미 사문화됐다"는 정부의 평가와 달리 남북 간에 우발적인 군사 충돌을 막는 명백한 효과가 지속됐다.
이는 냉전시절 유럽에서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 간에 맺어진 헬싱키 협정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범적 군비통제 합의였다. 정전협정이야 유엔사령부가 중국 및 북한과 체결한 협정이지만 군사합의서는 남북이 체결하고 유지시켜 온 단 하나 뿐인 한반도 평화의 안전장치다.
합의서는 비행금지구역과 훈련금지구역 및 평화수역이라는 완충구역을 정함으로써 지난 30여 년간 남북 간에 벌어진 국지전 발생 요인을 거의 다 제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사합의서는 연간 200회에 달하던 정전협정 위반 사례를 2건으로 감소시켰고, 군사분계선 일대의 접경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과 북방한계선(NLL) 일대 어업의 증진, 항행의 안전이라는 구체적 효과를 창출하면서 성공한 안보정책이라고 자랑할 만한 평화의 큰 자산이었다.
물론 북한의 잦은 탄도미사일 발사로 합의서에 정한 남북 적대행위 중지가 제대로 준수됐는지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고, 남북 군사 핫라인이나 남북 공동군사위원회도 성사되지 못한 아쉬움은 있다. 비록 합의서가 지향하는 적대행위의 완전 종식을 향한 큰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완충구역이 존재한다는 점은 수십조 원의 국방비로도 달성할 수 없는 안보의 증진이자 뛰어난 지략의 승리였다.
일순간에 고조되는 군사적 긴장
그런데 11월 22일, 윤석열 정부가 비행금지구역을 정한 9.19 군사합의의 1조 3항을 무력화하자 북한이 이튿날인 23일 군사합의 전체를 "무효화 한다"고 발표하면서 분위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북한 국방성은 "북남군사분야합의에 따라 중지하였던 모든 군사적 조치들을 즉시 회복할 것"이라며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취하였던 군사적 조치들을 철회하고 군사분계선 지역에 보다 강력한 무력과 신형군사장비들을 전진 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합의서 무력화로 우리가 북한을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사단과 군단에서 운용하는 드론(UAV)을 자유롭게 운용하는 군사적 이점을 취하는 동안 북한은 군사분계선 일대에 포병 화력을 증가시키고 드론의 활동도 배가시킬 것임을 사실상 예고하고 있다.
북방한계선 일대의 북한 해안포도 언제든 사격이 가능한 준비태세를 회복할 것으로 전망된다. 앞으로 우리의 해상활동을 예의주시하면서 북한은 해상 사격훈련도 재개할 것이다. 최근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군수공업시설을 자주 방문하여 생산을 독려했음을 감안한다면 군사분계선 일대에 초대형 방사포와 사거리 연장탄, 공격 드론도 추가 배치될 것이다. 전방 감시초소(GP)에서의 군사 활동도 증가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북한의 공세적 군사력 운용을 우리 군이 다 예상하고 대비하고 있다는 '착각'이다. 우리 군은 지금껏 북한에 대한 수많은 정보 수집의 실패를 경험하면서 인공위성이나 드론, 정찰기와 같은 기계 정보만으로 북한을 다 감시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하물며 인공위성으로 조종되는 원격무기와 암호 해독 및 감청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이스라엘이 하마스라는 무장단체의 기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무언가 힘을 자랑하면 북한이 굴복해 도발은 없을 것'이라는 오만과 망상은 버려야 한다.
지난해 12월에 북한이 무인기를 용산에 침투시키는 동안 대통령실은 그 사실 자체도 모르다가 대응에 실패했다. 그 두 달 전에 북한이 탄도 미사일을 강릉 앞바다에 발사한 데 대응해 우리 군이 현무 미사일을 발사했다가 그 미사일이 앞이 아닌 뒤로 날아가 우리 군 부대를 타격한 일은 또 어떠한가. 하물며 북한의 오징어잡이 목선이 동해 NLL을 월선해 우리 해안에 접근하는 걸 까맣게 모르다가 나포하지도 못한 경계의 실패는?
우리의 육지와 바다, 공중은 드론 몇 대를 보강하고 감시 장비를 추가 투입한다고 해서 안전이 보장되는 공간이 아니다. 실로 복잡한 공간에서 힘에 의한 안전의 한계를 인정한다면 나머지는 지략과 외교에 의한 안보전략으로 보완해야 한다. 이 교훈을 무시하고 합의서를 무력화하는 윤 정부의 단순무식함이 바로 앞으로 초래될 안보 공백의 가장 큰 주범이다. 윤 대통령은 실패한 이스라엘의 네타냐후식 안보를 닮아가는 중이다.
한밤의 전자결재, 소신을 버린 장군들
게다가 5년 2개월 동안 잘 유지돼 온 멀쩡한 군사합의를 깨는 중요한 결정을 뭐가 그리 급해서 윤 대통령이 영국서 전자결재로 재가했을까?
표면적으로는 북한이 10월 21일 밤에 정찰위성을 발사했다는 게 그 이유다. 3월과 8월에도 북한은 같은 정찰위성을 발사했지만 합동참모본부는 "큰 위협이 아니다"라고 했다. 특히 8월 발사 때는 북한의 로켓 잔해물을 수거해 기술평가를 해보니 북한 위성은 "3미터급 해상도로 군사위성의 가치가 없다"고 평가절하했다.
그런데 석 달만에 이뤄진 위성 발사에 대해서는 "심각한 위협"이라며 군사합의서 무력화가 불가피하다는 명문으로 내세웠다. 러시아 기술자들이 10월부터 북한에 들어가 북한 위성발사를 지원했다는 근거도 제시된다. 아무리 러시아가 북한을 조언했다 하더라도 위성은 설계와 제작에 수 년이 걸리고, 그 작동 원리는 한 달 만에 바뀔 수가 없다.
돌연 북한의 정찰위성이 심각한 위협이라던 군은 북한이 자기 위성으로 "괌의 앤더슨 공군기지를 촬영한 영상을 수신했다"는 발표에 대해서는 "신뢰할 수 없다"며 다시 평가절하한다. 헷갈리는 분석과 소신 없는 판단을 남발하는 군의 행태를 보면 우리 군이 북한의 능력을 종합분석하고 총괄적으로 평가하는 전문성이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럽다.
용산의 의중에 따라 군사적 평가를 제멋대로 바꾸는 군의 행태를 보면 이런 비전문가들에게 안보를 맡긴다는 일 자체가 불안하다. 게다가 지난 10월에 용산이 군 고위 장성을 전원 물갈이 하면서 합동작전의 비전문가를 합참의장과 차장으로 내정한 데서 군의 전문성은 붕괴됐다고 봐야 한다.
이런 인사는 적벽대전을 앞 둔 조조가 자신의 수군을 지휘하던 장수의 목을 치고 무능한 장수로 교체한 일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준다. 지금의 군 지휘부가 과연 남북 군사합의 파기 이후 전장에서 합동 작전의 판을 짤 수 있는 인재들일까. 이 점을 앞으로 잘 지켜봐야 하겠지만 용산이 군의 전문성과 안보상황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정권에 충성하는 장군들로 군을 줄 세우기 하는 행태를 보면 이미 안보의 절반은 실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우리 군에는 권력에 직언할 수 있는 장군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군사합의서가 무력화되는 상황에서 이 점이 가장 우려되는 점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종대씨는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전 정의당 국회의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