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나이가 20대 후반에 가까워졌다. 올해 들어 오랜 남자친구의 대화에도 '결혼'이 단골 소재가 됐다.
막상 결혼을 하려하니 고민해야 할 게 한 두가지가 아니였다. 결혼식은 몇 월에 할지, 상견례는 언제 잡을지, 집은 어디에 마련할지 등과 같은. 장애아동 복지 봉사를 하다 만난 우리 사이엔 자녀 계획 얘기도 빠지지 않는다.
쌍둥이 딸 낳고 싶었는데...
사실 꽤 오래 전부터 자녀 계획을 갖고 있었다. 바로 '딸 쌍둥이'를 낳는 것. 어느 때인가 놀이동산 회전목마 앞에서 나란히 손잡고 팔랑팔랑 뛰어가는 한 쌍둥이의 모습이 너무나 예뻐 보였다. 서로 똑같이 차려입은 노랑 원피스와 까르르 웃는 봄꽃 웃음이 참 어울리던 아이들이었다.
'저런 아이들을 꼭 나중에 내 딸로 만나야 지'라고 오랜 시간 꿈꿔왔다. 화가셨던 할머니와 시인이셨던 할아버지의 재능을 물려주고, 푸른 청바지를 입히고 같이 등산도 하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매일 만들어주는, 그런 알록달록한 꿈을. 누구보다 멋지고 근사하게 두 딸을 키워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상의 저편엔 늘 현실이 함께 있기 마련이다. 남자친구는 가만히 내 계획을 듣더니 조심스레 "딸은 좀 그런데"라고 말했다.토끼 눈으로 이유를 물었다. 그는 우물쭈물 내 눈치를 살피다가 답했다.
"딸은... 불안하잖아."
'불안'. 그 단어의 의미를 모르는 건 아니였다. 그래서 당황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나 역시 딸이란 이름으로 27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누군가의 사랑에서 비롯된 불안을 먹으며 한 살 두 살 성장해왔기 때문에. 마냥 알록달록하지만은 않은 여성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딸은 그저 딸이라는 이유로 늘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밤길로부터, 성범죄로부터, 보복 이별로부터, 낯선 이들로부터.
나의 아빠도 그랬다. 초등학교 때부터 저녁 8시가 통금이었다. 귀갓길 여아를 노린 성범죄 사건이 흉흉했을 무렵이었다. 몇 분이라도 통금을 어기면 노심초사하며 아파트 앞을 서성이던 아빠의 표정은 여전히 생생하다.
어른이 돼도 달라진 건 없었다. 직장생활을 위해 서울에서 첫 자취를 시작했을 때도 그랬다. 서울에서 어떤 사건사고라도 터지면 먼 시골에서 부리나케 전화가 왔다.
길 한 복판에서 습격 당했다던 20대 여성이 너는 아니지? 귀갓길에 이상한 남자가 따라오는 지 수시로 살펴보고. 산길로 다니지 마라, 짧은 치마도 입으면 안 돼. 자취방 문은 꼭 걸어 잠그고. 전화 끝마디엔 늘 같은 말을 덧붙이셨다. "네가 딸 가진 부모 맘을 어떻게 다 알겠니"라고.
나도 딸 가진 부모가 된다면 똑같을까. 매순간 노심초사 딸의 하루를 걱정할까. 나는 남자친구가 말했던 '딸은 불안하다'란 문장을 곱씹었다. 그 문장은 분명 딸이란 존재가 불안하단 뜻이 아니다. 딸이란 존재를 둘러싼 환경이 너무나 차갑고 거칠다는 의미다.
딸, 안전하게 살 수 있을까
올해만 해도 그렇다. 여전히 많은 딸들이 어둔 귀갓길을 걷고 있다. 지난 5월에는 40대 여성이 이별 통보를 전한 남자친구에게 폭행을 당한 뒤 신고하겠다고 하자 지하주차장에서 흉기를 맞고 목숨을 잃었다. 8월에는 신림동 공원에서 학교로 향하던 30대 여성이 너클로 폭행 및 성폭행을 당한 뒤 사망에 이르렀다. 12월에는 20대 여성이 집 안에 숨어 있던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 의해 폭행, 감금 및 성폭행 시도를 당했다.
딸들이 안전하게 살아가기엔 아직 세상은 얼음판처럼 불안정하다. 많은 이들의 눈물어린 노력으로 많은 부분이 바뀌고 개선됐지만, 올해도 날이면 날마다 누군가가 죽고 다치는 뉴스 보도들이 쏟아져 나왔다.
올 한해 <오마이뉴스>에서 여성의 안전에 대한 글을 기고하며 든 생각이 있다. 여성의 안전을 되찾는 여정은 분명 고되고 힘들다. 불편한 진실을 똑바로 마주해야 하고, 잘못된 게 있다면 잘못됐다고 똑똑히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힐난어린 시선을 받거나 예민하다고 지적도 받을 수도 있다.
오랜 세월 쌓여져 온 여성의 불안과 두려움의 벽을 허물기 위해선 그 보다 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지금 두렵다고 도망쳐버리면, 내 사랑하는 딸들의 안전도 함께 등져버리게 된다. 내가 걸어 온 그 어둔 귀갓길을 내 딸들도 똑같이 걷게 만들고 싶진 않다. 매일 행복하게 살아도 아쉬운 삶을 자신의 잘못이 아닌 불안으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수십 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더라도, 나는 끊임없이 여성의 안전을 말하고 글을 써내려갈 것이다. 여성의 삶을 위해 힘쓰는 수많은 이들의 안 보이는 연대를 믿으며. 세상은 분명 조금씩 바뀌고 있다. 어느 누구라도 귀찮고 불편하다고 외면하지 않는 이상, 내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은 분명 지금보다 더 밝고 찬란할 것이다.
"임신이 원하는 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꿈속에서 누군가 선택지를 준다면, 역시 딸 쌍둥이를 낳고 싶어. 대신, 내 딸들은 이곳 대한민국에서 불안하지 않은 삶을 살게 할 거야."
내 말에 남자친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세상을 함께 만들어보자고 약속하며. 창문 밖으론 12월의 눈이 소복소복 내렸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딸들과, 곧 세상에 태어날 다음 세대의 딸들이 이 시린 겨울을 봄처럼 따뜻하게 보낼 수 있기를. 그렇게 가만가만 바라는 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