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카프카스 땅을 밟고 돌아왔다.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의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을 주마간산으로 둘러보았다. 그래도 현장에서 이들 유산을 꼼꼼히 살펴보고 책을 통해 복습하면서 세 나라의 자연과 지리, 역사와 문화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30여 회 기사로 정리하면서 각 나라 문화관광자원의 가치와 의미 그리고 특색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다. 카프카스 삼국은 그 긴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문화유산과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또 그 나라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를 살펴보면서 유명한 인물에 대해서도 공부할 수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헤이다르 알리예프 대통령, 현대시인 알리아가 바히드, 음악가 무슬림 마고마예프 등을 알게 되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기독교를 공인하게 만든 성 그리고르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예레반에서는 건축가 알렉산더 타마니안, 예술애호가이자 자선사업가인 게라르트 카페지안이 남긴 유산을 볼 수 있었다. 또 아르메니아계 미국 작가 윌리암 사로얀, 아르메니아와 아르메니아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애쓴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동상을 만날 수 있었다. 조지아 시그나기에서는 니코 피로스마니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트빌리시에서는 이 도시를 개척한 박탕 고르가살리 왕의 동상을 만날 수 있었다. 조지아 사람들은 또 중세의 대표 시인 쇼타 루스타벨리를 도로의 이름에 넣어 그를 기리고 있었다.
이들 나라를 좀 더 잘 알기 위해서는 한 나라에 한 달 정도는 살아야 할 것 같다. 아제르바이잔에서 3박, 아르메니아에서 3박, 조지아에서 4박, 튀르키에에서 1박을 했으니 그 열 배는 더 묵어야 한다는 계산이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석유를 중심으로 한 경제, 언어와 종교(이슬람교), 문화와 예술, 삶의 현장 등을 더 살펴보고 싶다. 아제르바이잔 문학에 대해서도 제대로 공부하고 싶지만, 언어장벽으로 인해 쉽지는 않은 상황이다. 또 번역서를 구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역사적으로 과거에는 이란과, 현재는 튀르키에와 가까워 이들 나라와의 관계도 잘 알아야 한다.
조지아에서는 춤과 음악, 와인 문화를 체험했다. 트빌리시 메테키 지역 호텔에서 민속춤과 민속음악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트빌리시 야경 투어를 하다가 박탕 고리가실리 광장에서는 젊은이들이 펼치는 춤과 음악의 향연을 한참 동안 살펴보기도 했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조지아로 들어오는 관문인 카헤티주 시그나기 지역에서 처음 체험한 와인문화는 조지아 여행 내내 계속되었다. 조지아는 기원전 6,000년 경부터 와인이 생산되었다고 하니 와인의 역사가 전 세계적으로 오래되었다. 쿠타이시 서쪽 바니(Vani)에서 발굴된 청동 타마다 조각상은 오래된 와인의 역사를 증명한다. 2013년에는 크베브리를 사용하는 와인 제조법이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이 되기도 했다.
아르메니아인은 유대인 못지 않게 전 세계에 퍼져 살고 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그들이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핍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에 대해 시간을 가지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를 통해 아르메니아 역사를 좀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 정교에 대한 연구와 답사도 필요하다.
이번 여행을 통해 아르메니아 전역에 종교 관련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들 문화유산은 대부분 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중 우리는 일부만 살펴본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뒤지지 않는 문화유산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리고 음악에서는 현대 작곡가 하차투리얀(Aram Khachaturian)과 아르메니아 전통 악기(피리) 두둑(duduk)에 대해 공부하는 것도 대단히 재미있을 것이다.
알기 쉽지 않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두둑은 살구나무에 구멍을 내고 오리 부리 모양의 리드를 붙여 만든 아르메니아 전통악기다. 리드를 통해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고 손가락으로 여덟 개의 구멍을 막아 소리 내는 관악기다. 페르시아, 터키, 카프카스 지역에 널리 퍼져 있지만, 아르메니아 두둑 악기와 음악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두둑의 음색은 애절하고 간절하다. 그 때문에 고뇌의 순간이나 죽음을 예감할 때 잔잔하게 울려 퍼진다. 리들리 스콧의 영화 <글래디에이터 Gladiator>(2000), 마틴 스코르세지 감독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1988) 등에 두둑 음악이 사용되었다. 2008년에는 아르메니아 두둑과 그 음악이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아르메니아는 티리다테스 3세 때인 301년 기독교가 최초로 공인되었다. 그리고 성 그리고르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주교로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앞장 선다. 405년에는 아르메니아 문자가 만들어져 성경 번역이 이루어진다. 그때까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그리스어 성경이나 시리아어 성경을 사용했다. 451년 칼케돈(Chalcedon)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인간(hypostasis: person)으로, 신성과 인성 두 개의 본성(physis: nature)을 가지고 있다"고 결정했다. 이를 양성론(Dyophysitism)이라 부른다. 그런데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양성론을 반박하고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편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스러운 존재(divine being)로, 신성(divinity)과 인성(humanity)을 가진다. 이 둘은 하나로 조화롭게 통일된다. 하나로 통합된 의지(will)고, 조화롭게 통합된 에너지(ernergy)다. 그리스도의 강림은 신이 인간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는 신성과 인성 두 가지가 하나 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로 조화되려는 의지를 부정하면 완전하고 조화로운 성화(incarnation)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 합성론(Miaphysitism)이라고 부른다.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합성론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화 과정에서 신성과 인성, 에너지, 의지의 조화다. 그렇지만 성화 과정에서의 변화나 부가는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신앙(faith)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가톨릭 교회와 마찬가지로 7가지 성사를 인정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의식과 내용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아르메니아 헌법 8조 1항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국교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국교라는 이름으로 다른 종교에 배타적이거나 종교가 정치와 결탁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아르메니아 공화국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가 국교로서 역사적인 사명을 훌륭하게 완수했음을 인정한다. 영적인 삶과 민족문화의 발전 그리고 아르메니아 민족 정체성 유지에도 기여했음을 인정한다."
제3자의 문학 속 카프카스, 비유일 뿐이지만
윤동주의 시 '간(肝)'에 코카서스(산맥 이름)와 프로메테우스가 나온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신이다. 이를 부당하게 여긴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를 붙잡아 카프카스산의 바위에 쇠사슬로 묶어놓는다. 그리고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도록 하는 형벌을 가한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불사신이어서 매일 간이 재생된다. 프로메테우스의 속박과 고통은 헤라클레스가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먹는 독수리를 처치하고 쇠사슬을 풀어줌으로써 끝나게 된다.
일제강점기 이러한 속박과 고통을 당한 윤동주는 자신의 심정을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해 시로 표현한 것이다.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굴러떨어지는 프로메테우스를 불쌍히 여기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다짐한다. 더 이상 거북이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고, 그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별주부전>의 토끼 간 모티브와 연결시켜 문학적 비유의 지평을 넓혔다.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이번 글을 쓰면서 필자는 푸시킨(Aleksandr Pushkin)의 장편 서사시 『카프카스의 포로(Captive of the Caucasus)』도 읽어보게 되었다. 러시아 차르 체제와 선민 생활에 환멸을 느낀 러시아 장교가 새로운 모험을 찾아 코카서스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는 체르케스(Cherkess) 부족의 리더에게 체포되어 포로가 되었다가, 리더의 딸인 어린 소녀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이 작품은 러시아 차르체제에 대한 푸시킨의 반감을 보여준다. 러시아의 지배를 거부하는 카프카스인들의 의지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작품 배경이 북 카프카스 체르케스여서 카프카스 3국과는 좀 거리가 있다.
카프카스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현장 답사와 체험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번 여행을 통해 산과 강으로 이루어진 카프카스의 자연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역사 속에서 그들의 민족성과 정체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민족의 정체성은 문학과 문화로 표현되어 나타나는데, 그 바탕에는 자연과 지리, 역사와 종교가 뒤섞여 있다.
문화와 예술을 통해 보여주는 그들의 삶은 낯설음보다는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이번 여행을 통해 카프카스 여러 나라 작가와 예술가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 이들의 문학과 예술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이 훨씬 덜할 것 같다. 또 다시 카프카스를 여행하게 된다면, 이들 민족의 삶과 문화 그리고 예술을 좀 더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카프카스 문화유산 기행> 연재를 33회로 마친다. 다음에는 카프카스에 대해 좀 더 심층적인 내용으로 독자를 만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