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직도 옛날의 내가 좋아요. 엄마 아빠한테 사랑받고 걱정 없던 어린 시절이 좋아요. 지금은 학원도 가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도 하지 못해요. 다 귀찮고 하기 싫어져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들에게 사춘기가 온 듯하다.
오랜만에 회사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이와 자기 전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의 어린 시절에는 아빠와 내일이란 걱정 없는 무책임한 시간들을 놀며 보냈다. 아빠에게는 내일은 회사 가는 날이니 당연히 부담이 되는 날이었지만 아이에게는 그냥 즐거움의 연속인 시간이었을 것이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기 전 늘 아빠의 가공된 이야기보따리가 풀어졌고 이야기를 듣던 아이는 이야기 속에 빠져 잠에 들었다. 당연히 이야기하던 아빠도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는 잠에 빠져 이야기하던 중 헛소리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주말 아침에는 여지없이 밖에 나가 둘이서 야구, 축구, 농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아이가 어리기 때문에 져 주는 척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아이는 아빠의 실력을 뛰어넘었다.
여행을 가면 아빠는 아이가 하고 싶다는 걸 대부분 하게 놔두는 스타일이다. 당연히 아이는 아빠와 떠나는 여행을 즐거워했다. 1박 또는 2박 국내 여행지로 둘만의 여행, 그냥 뭘 하기보다는 자유시간을 갖는 여행이었다. 모든 시간들이 지나면 소중한 추억이 된다.
아이에게도 아빠와의 시간들이 이젠 즐거운 추억이 되어 가슴속 언저리에 맴돌고 있는 듯하다. 벌써 중학생이 되어버린 아이를 보면 "많이 컸구나. 이젠 어른이네" 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그런데 이 말에 돌아오는 아이의 반응은 요새 늘 이런 식이다.
"난 어른 아니야. 그냥 어른보다는 아이이고 싶어."
처음엔 그 말이 그냥 흘러가는 농담처럼만 들렸다. 무심히 듣고 흘렸던 말들이 진짜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방에 이불을 펴고 같이 자려고 할 때, 아이가 오랜만에 본 아빠에게 솔직한 마음을 전달한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린다.
"아빠 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예전처럼 아무 걱정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살고 싶어요. 학원도 공부도 다 하기 싫어져요. 공부를 안 하면 어떤 걸 할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다 귀찮고 걱정이 돼요."
사실 이 험난한 사회에서 너무 연약한 말인 듯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 자신에게 던져지는 공부라는 압박감, 어른이 되어가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책임감,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 부모님의 곁에서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 등 복합적인 성장의 고민들이 몰려오는 듯하다.
눈물의 양은 더 커지고 어린 시절 추억들이 생각나니 더 크게 가슴을 내려치는 듯하다. 그런 성장의 고통은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관문인데 지금 이 아이에게도 그런 시간들이 왔나 보구나 싶다. 그런데 아이에게 뭐라고 말을 할지 모르겠다.
연약해 보이는 아이에게 센 말로 응대하고 싶지만 그것보다 그냥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속마음을 아빠에게 솔직히 이야기해 주고 성장통을 겪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낸 아이에게 그냥 안아 주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법륜 스님이 언젠가 했던 인상적인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자식이 어릴 때는 따뜻하게 품 안에 안아주는 게 사랑이고, 사춘기 때는 지켜봐 주는 게 사랑이고, 스무 살이 넘으면 냉정하게 정을 끊어 홀로 설 수 있도록 하는 게 사랑이에요." - 법륜스님
내 어린 시절은 어땠나
지금의 아이보다 나의 어린 시절은 풍족하지 못한 시절이었다. 풍족하지 못하다는 것에 불만보다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냥 노력하며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공부 외에는 없었고 더 나아지기 위한 수단은 공부밖에 보이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인내하며 버틴 것 같다.
과거는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며 뛰어놀던 시절이었다면 지금은 학원에서 친구들을 만나야 하는 시절이다. 친구들과 놀고 싶어도 놀이터에 아이들이 없어 혼자서 집에서 스마트폰으로 익명의 친구들과 게임을 하는 시절이 되었다. 하루의 일과가 학원 스케줄에 끼어 맞추어져 있어 학원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는 시절이 되었다.
예전에는 그냥 방치하면 형제들끼리 서로 보살피며 살아왔지만 시대의 변화 속에 아이의 존재는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고 키우는 방식도 달라졌다. 하지만 나이대의 고민들의 형태와 방식이 다르게 보일 뿐 본질적으로 성장의 과도기를 겪는 것은 인간으로서 동일하다.
"나한테 다 컸다는 말은 이제 하지 말아. 난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명확해진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잊고 싶지 않고 지금의 꽉꽉 막힌 스케줄에 어린 시절의 무책임과 그리움이 자신을 어린 시절의 자기로 묶어 두고 싶다는 이야기다. 이해한다. 그리고 아이는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성장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라"? 아이에게 그런 말은 할 필요도 없다.
그냥 그렇게 성인이 되어가고 자아의 갈등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아빠도 늘 고민한다. 네가 고민하고 겪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일어나. 아빠는 지금도 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이 돼. 왜 아빠가 나이가 들어가고 회사를 다니면서도 책을 읽고 공부를 할까? 지금도 아빠는 늘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어. 그래서 그 고민들을 벗어나고 싶은거지.
어느 때는 아빠도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그만 두고도 싶어.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는 없더라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으면 오히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해야 하더라고.
이제부터는 다 컸다는 말은 안 할게. 그냥 아빠는 네가 심신이 건강하게 잘 자랐으면 좋겠어. 너무 답답할 때는 좋아하는 농구를 하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며 어느 때는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가다듬기도 했으면 좋겠다. 지칠 때는 아빠하고 약속한 국내 전국일주, 유럽 배낭여행을 생각하며 기분전환을 했으면 해."
모두가 겪는 성장통... 고통이 있어야 자란다는 역설
일견 연약해 보이는 고민이지만 전혀 연약한 고민이 아닐 수 있다. 성장하고 변해가는 과정 속에 누구에게나 강도의 차이일 뿐 이런 성장통은 거치게 된다. 이 과정을 겪고 나와야 '자아'를 만나고 성장하는 '나'를 대면할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보내는 편지 속 명대사가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세상을 알아간다는 것은 나이가 든다는 것이다.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성장하고 아파한다. 그리고 '자아'를 만나며 묻고 대답하고 힘들어한다.
아들에게, 그리고 성장통을 겪고 있는 모두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삶은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이고, 과정은 우리에게 고통을 알게 한다. 그 고통 속에 자아라는 존재를 만나 우리는 성숙해진다. 그리고 아이가 어른이 되고 우리는 다시 아이가 되어 이 세상을 떠난다. 삶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