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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압사 참사가 발생한 지 열흘이 지난 2022년 11월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며 두고 간 국화꽃과 추모 메시지가 놓여있다.
이태원 압사 참사가 발생한 지 열흘이 지난 2022년 11월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며 두고 간 국화꽃과 추모 메시지가 놓여있다. ⓒ 유성호
 
대사관들이 모여있는 한남동 길을 오르면 예쁜 골목들이 나타난다. 외국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는 한류의 장소이다. 경사진 몇 골목을 더 오르면 이태원 거리가 나온다. 좌회전을 하고 지하철역에 다다르면 해밀턴 호텔 옆 좁은 골목을 맞이하게 된다.

수많은 메모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바로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던 좁디좁은 골목길이다. 나는 고국을 방문을 하는 동안 먼발치에서 몇 번을 두리번거렸지만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그저 멀리서 바라볼 뿐 차마 발을 내디딜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표현도 사치스럽다. 미안함과 창피함이라고 해두자. 모두 159명이라는 소중한 분들이 그 좁은 골목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의 현재, 꿈, 미래는 아직도 그곳에서 매몰되어 멈춰서 있다.  

사별가족 모임을 정기적으로 이끄는 사람으로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게 되면 사별가족과 친구들은 심각한 슬픔, 우울감, 죄책감 속에서 살아간다. 미리 예측된 마지막도 힘들지만 예고되지 않는 사고라면 고통은 더욱 가중된다. 수그러듦의 시간도 길어져 가슴에 묻기도 버거운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특히 정황이 납득되지 않는 죽음이라면 유가족과 지인들은 명확한 원인 규명과 책임을 듣고 싶어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되는 상황이라면 사망자들의 슬픔과 억울함을 풀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 힘을 합하게 된다. 이유는 누구 하나 진상을 규명하거나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슬그머니 책임을 전가하며 남 탓만 늘어놓는다. 더 가관은 유가족들을 혐오스럽다고 비방하는 무리들까지 등장한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일 년 하고도 몇 개월을 지나고 있다. 소중한 대한민국의 사람들이 하룻 저녁에 비명횡사를 당했음에도 누구 하나 자의든 타의든 책임지지 않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행정안전부 장관의 탄핵에 면죄부를 주었고, 용산 구청장은 보석으로 풀려났다. 사퇴를 요구하는 소리들이 빗발치지만 아직도 그녀는 고집불통이다.

대통령은 진상 규명이 우선이라고 말할 뿐 시간을 흘러 보냈다. 공식 사과라고 하지만 유가족들을 위로하기에는 턱없어 보였다. 이제야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진통 끝에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인다. 모름지기 진심 어린 사과란 자기반성의 책임, 처벌, 그리고 후속 대책이 따라야 하는 법, 그렇지 않으면 가식이며 눈속임에 불과한 것을 모르는가.   
       
인성과 책임감을 상실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관료들이 버젓이 자리하는 이 땅에, 국민은 각자도생밖에는 탈출구가 없는가. 백성은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나. 세금은 왜 내고 사는가. 재주는 국민이 부리고, 때 되면 대책 없이 죽어 나가야 하는가. 일상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한 채, 진상 규명도 하지 못한 채, 꿈이 접힌 이들은 비좁은 골목길에 아직도 머물러 있다. 

수년 전에 멕시코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잠자리가 바뀌고 시차 때문이었던지 새벽에 뒤척거렸다. 새들도 숨죽이는 새벽에 설익은 미명(未明)을 깨우는 울음이 멀리에서 들렸다. 그 순간 옮겨 적은 글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날지 못하는 울음

새벽녘 미명을 여는 / 수많은 지저귐들 / 날개에 깃털을 입은 새들이 / 재잘거림 뒤에 존재하지
다양한 색깔의 콜라주collage가 / 수놓아 입힌 것처럼 / 아름다운 것을 / 휘날리며 뽐내고 있어
어디에선가 흘러오는 / 곱지만 찌를 듯한 / 거친 소리의 향연이 / 아침을 깨우는 거야
사람들이 / 아름답고 고운 새의 자태와 / 감미롭고 달곰한 소리에 /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
평범하다 그지없는 / 주목받지 못한 깃털의 / 꼬꼬댁 닭들이 / 너와 나의 새벽을 깨우는 거야
예쁜 소리와 거리가 멀어 / 툰tune되지 않은 태평소처럼
다가서기도 머뭇머뭇 / 귀를 찌르는 소음들이야 / 날지 못하는 울음일 게야
새벽을 알리는 닮의 울림은 / 노래도 우아함도 아닌
날지 못하는 설움이겠지 / 쳐진 날개의 애타는 눈물일 게야

<날지 못하는 새도 아름답다> 시집 중에서, 2019, 이상운 시인
 
세상에는 설움의 애타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다. 주목받지 못해서 멋들어지게 날개조차 펴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의 쳐진 날개의 안타까운 눈물을 3.2m의 좁은 이태원 골목에서 보았다. 그들의 설움은 '날지 못하는 울음'이었다.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조국의 미명을 깨우려는 울분의 태평소 소리였다. 문제는 공감 장애를 가진 사회에게는 단지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월호 이후에도, 이태원 이후에도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지난 9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태원참사 특별법 표결을 앞두고 이만희 국민의힘 의원이 반대 토론에 나서자, 방청석에서 이를 지켜보던 한 유가족이 절규하고 있다.
지난 9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태원참사 특별법 표결을 앞두고 이만희 국민의힘 의원이 반대 토론에 나서자, 방청석에서 이를 지켜보던 한 유가족이 절규하고 있다. ⓒ 남소연
 
어찌 159명의 소중한 생명에 대한 문제뿐이겠는가. 비명횡사로 그들을 떠나보낸 유가족들은 어떡하라고. 비명을 지르며 밀리고 깔리고 버티던 수백 명의 부상자들은 어떡하라고. 한 사람이라도 살리고자 격한 감정을 참으며 동분서주했던 대원들은 어떡하라고. 모두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 트라우마는 오롯이 국민의 몫인가.

왜, 우리 조국의 리더들은 모두 한 모양인가. 일제강점기에도, 전쟁 후에도, 유신 때에도, 군부독재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고, 나 몰라라 외면해왔다. 현대에도 숱한 사람들이 이유 없이 목숨을 잃었다. 때마다 새벽 미명을 깨우는 통한의 외침들이 있었건만, 왜 사고와 변명은 반복되는 것인가 말이다.

더 화나는 것은 정부의 관료들이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그들은 모르쇠로 입을 닫을 뿐이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그들의 사전에서 지운 것은 아닐까. 혹시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대중은 망각한다' '다른 큰 이슈를 터트리면 대중은 잊어버린다'는 생각을 가문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지 않는지. 그러기에 그들의 자손들이 얼굴을 치켜세우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형식이 아닌 진심 어린 사과와 양심 있는 책임을 지는 것이다. 특별법으로 진상 규명과 함께 지각 있는 정부로 깨어나기를 바라본다. 나라의 미명을 깨우는 울분의 외침들이 헛수고가 되지 않기를. 살기 좋은 나라는 고사하더라도 국민의 안전을 지키려는 양심 있는 국가이기를. 각자도생 밖에는 별도리 없는 무책임한 나라라면 국민이 너무 서글퍼지지 않겠는가. 

#이태원참사#날지못하는울음#이태원참사특별법#이상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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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소수가 절망의 벽을 무너뜨린다' 애틀란타 한인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며 가족치료 상담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적한 동네에서 자연 생태계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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