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수정: 7일 오후 3시 10분]
"의사일정 제4항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사능 등 유해물질로부터 안전한 식재료 공급에 관한 조례안(아래 방사능 안전급식 조례 또는 안전급식조례)에 대하여 표결할 것을 선포합니다. 의원님들께서는 투표해주시기 바랍니다."
지난해 12월 19일 송파구의회에서 열린 제307회 본회의. 박경래 의장(국민의힘)의 말에 기대감과 불안감이 교차했다. 주민들이 2년 넘게 기다려온 방사능 안전급식 조례가 드디어 통과되는 걸까?
주민들이 추진한 방사능 안전급식조례
방사능 안전급식 조례는 아이들이 먹는 학교·어린이집 급식 식재료에 대한 방사능 및 유해물질 검사에 지방자치단체(도, 시, 군, 구)의 예산과 행정력을 쓸 수 있도록 하는 조례이다. 교육청에서 학교 급식 식재료 관련 방사능 검사를 하고 있지만, 예산과 인력이 부족할 경우 이를 보완할 수 있도록 전국 27개 지자체에서 해당 조례를 채택하고 있다. 특히 교육청 소관에서 제외되는 어린이집의 경우 지자체 조례를 통해 사각지대를 보완하는 의미가 더욱 크다.
송파구에서는 2021년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 방류 계획을 발표했을 때, 아이들의 먹거리 안전을 우려한 주민들이 직접 나서 조례 제정을 추진했다. 조례는 보통 지자체 의원들이 만든다. 그러나 "주민의 직접참여를 보장하고 지방자치행정의 민주성과 책임성을 제고"하기 위한 '주민조례발안법'에 의해, 일정 수 이상의 주민이 참여하면, 주민이 직접 조례를 발의할 수 있다.
'방사능으로부터 안전한 아이들 급식만들기 송파 주민모임'에는 주민과 지역 생협, 시민사회단체, 지역 활동가들이 함께했다. 송파구민 1%의 서명을 3개월도 채 안 되는 기간 안에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많은 주민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건널목, 산책로, 학교 앞, 종교 시설, 생활협동조합 매장 등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서명을 받았다. 늦여름 반팔티를 입고 시작한 서명운동은 12월 영하의 날씨에 끝맺었다.
6천 주민서명보다 더 큰 관문은 구의회
송파 주민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무려 9746명 주민이 서명에 동참했다. 이 중 개인정보 작성을 꺼려 생년월일과 상세주소를 끝까지 쓰지 않은 경우, 만 18세 이하 어린이와 청소년 등을 제외하고 6485명만 청구인으로 인정되었다. "우리도 해도 돼요?" "나 이거 하고싶은데..."라고 다가와 서명했던, 급식 당사자인 어린이와 청소년의 서명이 인정되지 않은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송파구 최초의 주민조례 청구 사례가 만들어진 것에 대한 기쁨도 잠시, 어렵사리 청구 요건을 갖추고 나니 의회라는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민조례발안 제도에서 주민은 조례를 발의할 수는 있지만, 조례를 심사하고 제정할 최종 권한은 전적으로 의회에 있다. 송파구의회에서는 서명용지 제출 후 1년 4개월이 지나서야 주민조례를 심의하였다.
하지만 2023년 5월 19일, 송파구 재정복지위원회는 주민조례를 반대 6, 찬성 1(무기명)의 결과로 부결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조례에 대해 의회가 협조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의회는 생각보다 비협조적이었다. 약 2시간의 회의 동안 의원들은 대표청구인의 자격이나 조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집중했다.
"주민조례는 취지상 큰 문제가 없는 이상 통과시켜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설령 주민조례가 문제가 있다면, 전문가라는 의원들이 연구를 해서 보완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무슨 청문회 보는 줄 알았어요. 무서워서 주민조례 하겠나요?" 이날 심의를 생방송으로 지켜본 한 주민의 의견이다.
주민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의사결정에 참여한 각 정당 지역위원회(당원협의회)에 연락을 취해 간담회를 진행했다. 구의원, 구의장에게 만남을 요청하여 항의와 읍소를 했다. 송파구의회 게시판에 게시글을 달고, 구의원들에게 문자를 보내 지지를 요청했다.
의원발의안이 상정됐지만... 이번엔 본회의
후에 일부 의원들이 방사능 안전급식 조례를 발의했다. 의원 발의 안전급식 조례는 주민조례가 부결된 지 반년 만인 지난해 11월 말, 상임위원회인 재정복지위원회를 통과했다. 주민조례에 비해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다.
"투표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재석의원 26명 중 찬성 11명, 반대 14명, 기권 1명으로, 의사일정 제4항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사능 등 유해물질로부터 안전한 식재료 공급에 관한 조례안은 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조례는 다음 관문인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대거 반대표를 던졌다. 총 26명 의원 중 국민의힘 의원이 15명으로 과반인데, 1명 기권을 제외한 14명 모두가 반대표를 던졌다. 참고로, 당일 본회의에 상정된 13개 안건 중 이 조례가 유일하게 부결되었다.
반대의 이유를 알고팠던 주민들은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에게 질의서를 보냈다. 답이 오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답이 오지 않고 있다.
실패가 우리에게 남긴 것
때론 쓰라린 실패가 현실을 일깨워줄 때가 있다. 송파구 최초로 발의된 주민조례가 의회에서 부결된 경험은 몇 가지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우리 사회의 대의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주민을 대변해야 할 의원들이 주민이 요구한 조례를 폐기하였고, 주민들이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침묵했다. 과연 의원들은 누구를 대변하는 것일까?
둘째, 지금의 주민조례발안제는 주민의 직접 참여를 정말 보장하는가? 주민들이 조례를 발안해도, 의회가 이유를 막론하고 부결해 버리면 그만이다. 바로 폐기되어 쓰레기통에 들어간다. 주민의 직접 참여를 보장한다고 하기엔 제도에서 보장된 의회의 권력이 너무 막강하다.
제도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두 가지 방향의 개선을 제안한다. 첫째, 의회가 정당한 사유 없이 주민조례를 부결할 수 없도록, 주민조례에 더 힘을 실어주는 방법이다. 특별한 사유 없이는 주민조례를 부결할 수 없도록 하여, 주민이 발의한 조례를 부결할 땐 사유서를 첨부하도록 한다면, 주민의 직접참여가 더욱 보장될 것이다.
또 다른 방향은, 의회의 재가가 필수적이라면, 어차피 의회 심의가 있으니 오히려 주민조례의 청구 조건을 완화해서 주민들이 더 자유롭게 조례를 발안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이다. 18세 이상 주민 1%, 생년월일과 상세 주소까지 90일 안에 받는 것은 생업이 있는 주민들이 충족시키기 매우 어려운 조건이다. 차라리 청구인수나 청구기간을 완화해서 발안을 좀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열어두는 것이 제도의 취지를 더욱 살리는 길 아닐까.
주인이 주인의 몫을 되찾는 정치
주민조례의 성공여부를 떠나, 지난 2년간 송파구의 주민조례사례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일단 9천 명 넘는 주민들이 직접 제도를 바꾸는 일에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었다. 또, 주민조례가 부결되었을 때 가만히 있지 않고 주민들이 집단으로 항의하였다. 이를 통해 최초 주민조례에 부정적이었던 일부 의원들이 태도를 바꿔 "처음이라 몰랐다. 다음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고 주민들에게 유감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민주주의에서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정치의 진정한 주인은 소수 정치인들이 아니라 바로 다수 시민 개개인이다. 우리 정치를 보면 주객이 전도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송파 최초로 발의된 주민조례는 일단 실패했지만, 송파 주민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에서처럼, 주인이 주인의 몫을 되찾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국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과정의 한 걸음일 뿐이다.
* '안전한 급식을 위한 송파 주민모임'(카카오톡 오픈채팅방): https://open.kakao.com/o/ghLdF9if
송파구의회가 반론을 보내와 싣습니다 |
지난 6일 송파구의회(의장 박경래)는 주민조례안 부결 이유에 대해 "(조례안 발의를 위한 주민 서명 과정에서) 송파구 로고 무단 사용 등 형식적으로 정당성이 결여됐으며, 내용적으로 급식의 체계와 방사능 검사 현황 등에 대한 기본적인 답변이 부실하게 준비된 점과 조례 자체에 대한 애정과 진정성이 부족해 보이는 청구인의 모습 때문이었다"라고 밝혔다.
로고 사용은 해당 기관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굉장히 초기에 시정했으며 조례 발의의 핵심 부분도 아니라는 청구인 측 입장에 대해선 "송파구 로고 사용을 통해 송파구청이 주민서명을 받는 것으로 오인할 수도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매우 큰 절차적 하자가 있는 것"이라며 "송파구 로고 외에도 방사능감시센타의 명의도 무단으로 도용해 절차적 정당성에 문제가 크다"라고 반론했다.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이 주민들이 보낸 질의서에 답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에는 "12월 말에 조례가 부결되었고, 1월은 의회가 개의하지 않는 기간"이라며 "2월에 임시회의가 개의된다"라고 답했다. 주민조례가 부결된 후 유감표명을 한 건 "주민조례가 부결된 것에 대해서는 유감이라고 표명을 했지만, 부결된 사유에 대해서는 위원회의 소관사항이기 때문에 이 부분 자체에 대해서는 의회 차원에서 언급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안전급식조례 대표청구인이자 미래당 송파구위원회 위원장입니다. 개인 블로그 '지속가능한 송파생활'에서 조례, 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