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숙(毛允淑, 1909~1990)‧노천명(盧天命, 1912~1957)의 뒤를 잇는 '한국 시의 대모(大母)' 김남조(金南祚, 1927~2023) 시인이 지난해 가을 96세를 일기로 정들었던 우리 곁을 떠나 그가 믿는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비록 이승에서의 삶은 끝났지만 그는 아마도 그리스도 품 안에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근자에 그의 추모 전시 '시가 있는 그림'(2023년 12월 27일~2024년 1월 11일)이 열렸다는 소식을 신문 지상을 통해 접했다. 고인의 시를 화가들이 그림으로 형상화한 전시회다. 평소 그의 시를 사랑하고 서로 교류했던 12명의 화가들이 시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 20여 점이 출품됐다고 한다. 주최 측 설명에 따르면 "이번 전시는 고인의 팔순시화전과 88세 미수기념전에 좋은 작품으로 선생님을 기쁘게 해 드린 화가 분들이 선생님을 기리며 제작한 작품들로 마련했다"고 한다.
전시회에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에서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은 '그대 있음에'였다. 시에 문외한인 필자에게도 그 시가 유독 마음에 들어왔던 것은 아마 가수 송창식에 의해 대중가요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 시는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 시 중의 하나로도 꼽히고 있다.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그대 있음에/내 마음에 자라거늘/오, 그리움이여/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나를 불러 손잡게 해//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그대 있음에/삶의 뜻을 배우니/오, 그리움이여/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 (1964)
"김남조의 얼굴에는 언제나 속세를 떠난 깨끗한 모습이 보인다"고 했던 김동길(金東吉, 1928~2022) 교수는 그의 시 전체를 가리켜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이라고 칭송했다. 그리고 그 바탕엔 인간과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이 깔려 있다고 해석했다. 김남조 자신도 2007년 제11회 만해대상 문학부문상 수상 소감에서 "문학은 세상에 희망을 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시인 역시 희망의 수사학(修辭學)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가 일차적으로 희망의 수사학이 되돼야 함은 당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친다면 시는 큰 울림으로서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지인 한 사람은 몇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미투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었던 한 저명 시인의 시를 인용은커녕 다시는 입에 올리지도 않으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희망의 수사학을 뛰어넘어 시인의 성품과 일상이 시의 정신과 부합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희호 여사와 가수 조영남이 말하는 김남조
시의 세계만 널리 알려진 김남조는 어떤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또 그의 일상은 어떠했을까. DJ의 영부인 이희호(李姬鎬, 1922~2019) 여사와 가수 조영남의 기억과 증언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은 김남조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이를 드러내어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1946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이희호는 그 시절 기억나는 후배로 주저없이 국문과 김남조를 지목했다. 두 사람 사이의 친분 관계는 그 후로도 이어져 다섯 살 연상인 이희호가 소천할 때까지 계속됐던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96세에 죽음을 맞이한 묘한 인연도 갖고 있다. 김남조는 이희호와의 관계를 '긴 끈의 연분'이라고 표현하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오면서 50년 넘는 긴 세월의 획을 그을 수 있는 인연은 드문 일이라고 했다.
이희호는 자신이 외롭고 고난에 찬 시절에 자주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김남조의 집을 찾아가 많은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흔히 일컫는 유신시절, 이희호의 곤경과 궁핍은 극도에 달해 있었고 이를 각별히 여겨 비교적 잦은 만남을 가졌다고 김남조도 술회했다.
이희호가 기억하는 김남조는 늘 사람을 극진히 맞이했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시처럼 그윽하게 말하는 김남조와의 만남은 지쳐있는 자신에게 단비와 같은 심신의 휴식이었다고 회상했다. 어쩌면 김남조에게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을 우러르는 것은 그 자체가 선(善)이기 때문에 무조건 지켜야 하는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정언명령(定言命令)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희호는 자신의 방문으로 인해 김남조가 정보부에 불려가 심문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아주 후일에야 알았다고 한다. 당시에 김남조가 그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여 이희호가 발길을 끊지 않을까 염려해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남조 아니면 누구도 감히 흉내내기조차 힘든 용기 넘치는 사랑의 발로였다.
사랑은 남을 받아들이는 어려운 것으로 그 자체로 위험하고 자신을 위협하기도 한다. 하물며 권력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 온갖 겁박을 무릅쓰고 고통 받는 이희호에게 손을 내밀었던 김남조의 사랑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5-37)를 통해 진정한 내 이웃이 누구인지 가르쳤고 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태오 6:1-4)고 구제의 방법을 제시했던 예수의 복음서 대목을 연상케 한다.
한편 조영남은 자신의 미술전시회 덕분에 '초지일관 송창식 예찬론자'였던 김남조와의 친분이 두텁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1973년 11월 한국일보사 건너편, 지금은 없어진 한국갤러리에서 열렸던 그 전시회에 김남조를 초대했던 것이다. 군 제대 후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갖고 있던 30~40점의 그림을 모아 연 첫 작품전이었다. 전시회장에 나타난 김남조의 유난히도 단아한 모습은 아직도 머리에 박혀 있을 정도라고 했다. 김동길이 보았던 '속세를 떠난 깨끗한 모습'이 오버랩돼 떠오른다.
김남조는 같은 시인이라서 그랬는지 고무도장을 파듯이 일일이 파서 만든, 윤동주(尹東柱, 1917~1945)의 시를 여덟 폭짜리 병풍으로 만든 작품을 그것도 거금을 내고 가져갔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단서가 붙은 구입이었다.
"나는 이 작품을 가져가겠습니다. 그러나 아주 가져가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조영남씨는 이 작품을 그리워할 때가 있을 겁니다. 그때 저를 찾아오시면 잘 보관해 두었다가 돌려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작가가 이미 남의 수중에 들어간 작품을 훗날 그리워하게 된다는 사실은 아마 조각가인 남편 김세중(金世中, 1928~1986)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에서 유추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작품에 자신의 혼을 불어넣는 작가에 대한 배려와 작가가 곧 작품이라는 믿음에서 우러나온 참으로 고귀한 언약이 아닐 수 없다.
이 일이 계기가 돼 조영남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김남조의 집에 초대받게 됐고 '늘 사람을 극진히 맞이한다'는 집주인으로부터 최고의 진수성찬으로 저녁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12년 후 조영남이 미국 생활을 마치고 막 돌아왔을 즈음, 그는 김남조의 집을 다시 방문했고 옛날의 약속대로 병풍을 고스란히 무상으로 돌려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과연 약속을 천금같이 여기고 이행하는 김남조였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돈으로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미술작품이 재테크의 대상으로까지 물화(物化)가 돼 버린 요즈음, 일찍이 들어본 적 없고 믿기도 힘든 희유의 사건임에 틀림없다. 조영남 자신도 "누가 믿겠는가. 나는 그저 한 시인의 긴 안목에 놀랐을 따름이었다"라고 감탄했다.
말과 행동이 이율배반적으로 괴리된, 외식(外飾)하는 지식인이 차고 넘치는 혼탁한 세상에서 김남조는 이처럼 묵묵히 타인을 향한 사랑을 실천했으며 그 실천이 때론 약속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의리로도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 곁을 떠난 김남조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진한 아쉬움과 더불어 그를 기리고 추모하면서 이런 미담의 당사자들이 앞으로도 계속 나타나는 우리 사회가 되기를 갈망한다.
[참고문헌]
김동길 <백년의 사람들> 2020
이희호 <동행> 2008
조영남 <놀멘놀멘:제2부>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