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월요일, 지인의 초대로 동인천 답동과 자유공원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천 토박이인 지인은 등산용 스틱을 짚고 동인천역에서 나를 기다렸다. 나는 동인천으로 가기 위해 이른 출근 시간 때 북적이는 지하철을 탔다. 대신 두 시간 지나 내릴 무렵 열차는 텅 빈 공간의 한가로움을 맛보게 해주었다.
지인은 한 달 반 전 복숭아뼈에 금이 가는 사고를 당했다. 지금은 다행히 목발은 귀찮아 버리고 스틱 하나로 동인천 주변을 느리게 활보하며 지낸다. 이런 지인은 한참 전부터 나를 초대하고 싶어 했다. 유서 깊은 동인천 주변을 소개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선 1895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 극장 겸 무대인 애관극장으로 향했다. 골목길엔 소박함과 예스러움이 풍겼다. 애관극장에서 조조 티켓 금액(1인당 6천원)을 내고 <서울의 봄>을 관람했다. 웰메이드 영화다. 소심한 장성들이 극악무도한 한두 장성의 위력에 눌려 잘못된 선택을 해나가는 과정을 긴장감 넘치게 그려냈다.
반란의 역사를 스크린으로 접한 관객들이 분통이 터져 스트레스를 잔뜩 받기도 한다는 영화를,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지고 한국 현대사와 맥을 같이 해온 극장에서 관람했다.
지인은 영화관이 가득했던 거리가 카페 골목으로 변모하는 것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애관극장을 인천시가 매입해서 시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극장을 지키고자 하는 바람은 영화인들도 마찬가지다. 한 예로 2021년 <보는 것을 사랑한다>라는 제목의 다큐를 만든 것이다. '애관(愛觀)'이다. <서울의 봄> 관람 후 대형 스크린과 드넓은 객석이 있는, 단독 상영관 시절의 1관을 잠시 보고 나왔다.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답동성당으로 향했다. 1897년에 지어진 본당 건물은 주변에 지어진 건물들로 인해 시야가 가려져 있기도 하지만, 예전엔 사방에서 보이는 노아의 방주 같은 곳이었으리라 생각되었다. 드넓은 언덕의 답동성당 마당은 아이들이 뛰어노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우리는 마당 한편에서 마음에 와 닿는 성서 한 구절을 발견했다. 길쭉한 철제 푯대에 세로로 새겨져 있었다. "향유와 향이 마음을 기쁘게 하듯 친구의 다정함은 기운을 북돋아준다"는 성경 잠언 구절이다. 지인과 나는 글과 대화를 통해 서로 그런 기운을 주고받곤 한다.
점심식사 장소로 찜해 놓은 식당 '명월집'에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전기 아닌 석유곤로로, 김치찌개를 대형냄비에다 끓이는 집이다. 손님들이 원하는 만큼 떠서 먹으면 된다. 밑반찬도 푸짐했다. 밥을 먹다가 지인이 느닷없이 배낭에서 막걸리병을 꺼냈다. 이럴 수가! 집에서 직접 세 번 빚어 만든 삼양주란다. 시중에 판매되는 막걸리는 한 번 빚은 단양주다.
그 삼양주를 플라스틱 병에 담아 와 나에게 선물로 건넸다. 다른 병에 소량으로 담아 온 삼양주는 반주로 나눠 마셨다. 한 번 빚을 때마다 도수가 6도씩 올라간단다. 진득하고 찰진 맛이 났다. 된장, 고추장이든 술이든 맛있게 만드셨다는 어머니의 손맛을 자신도 물려받았으리라 믿으면서 손수 만들어보았다고 한다.
영화세트장 느낌의 거리를 걷다
적산가옥이 가득한 일본 풍의 거리를 걸었다. 영화 세트장 같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는 지인의 말을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19세기 말 청국과 일본이 개항 도시 인천을 점령하고 있을 때 그 근거지를 '조계지'라고 불렀는데, 자유공원으로 향하는 골목을 경계로 해서 한쪽은 일본 조계지, 반대쪽은 청국 조계지로 양분됐다. 그 경계를 사이에 두고 확연하게 다른 거리 풍경을 지금까지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느린 유람을 추구하는 우리는, 중국인 거리는 포기하기로 했다.
우연히 개관 준비 중인 갤러리를 들를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림 대신 꽃을 만났다. 처음 들어본 이름, 산당화다. 명자나무, 명자꽃이라 불리기도 하는 봄꽃이다. 갤러리 입구 옆 유리벽 부스에 우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주홍색 꽃잎이 다섯 장, 암술 수술 구분이 잘 안 되는 꽃술이 마치 찻잔 모양의 수선화 부관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길가에서 명자나무는 자주 봤어도 양반집 내당 같은 공간에서는 처음 본다. 명자꽃보다는 산당화라는 명칭이 기품 있어 보여 더 좋다. 괜히 도자기 옆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알고 보니 산당화의 별칭이 '아가씨나무'다.
지인은 내게 보여주고 싶은 곳을 가기 위해 자유공원으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도 서슴지 않고 올랐다. 그 뒤엔 인천항의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 있는 카페 '파랑돌'로 안내했다.
나는 에스프레스 샷 추가를, 지인은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그런데 에스프레소를 두 잔 가져다준다. 지인이 단골이어서 그렇기도 했겠고, 프랑스 프로방스 여행 경험으로 카페 이름을 지었다며 직전에 주고 받은 짧은 대화가 좋아서 그랬기도 했겠다 싶다.
널찍한 공간에 서향 창 앞에 무수한 꽃들이 나름의 서식 공간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 주인장은 일부러 창 주변의 조명을 어둡게 했는데 덕분에 새가 그려진 한지등이 야경 속 따스한 모닥불 역할을 톡톡히 했다.
카페 안이 어둑신해질 때까지 지인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간은 대화를 좌우한다. 동인천 구석구석의 역사적인 곳, 밥집을 차려주는 식당, 모던한 카페 그리고 늘 바닷바람에 노출돼 소금기 어린 거리들... 지인은 저녁으로 갈비탕을 대접하고 역시 동인천역에서 나를 배웅해 주었다. 느린 보폭으로 걸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던 온종일 동인천 나들이였다.
종일 구경한 동인천은 내게 '보는 것을 사랑하게 만드는' 곳이다. 극장에선 영화를, 성당 마당에선 때마침 어울리는 성서구절을, 식당에선 곤로와 김치찌개와 삼양주를, 카페에선 운치 있는 풍경을 보았다. 그런 대상을 보는 것이 사랑스럽다. 지인의 정성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서울에서 동인천 왕복 네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발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