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라는 속담이 있다. 가부장적인 전통이 짙게 깔리고, 모순의 신분제도가 서슬 퍼런 시절부터 전해내려온 옛말이다. 최근에도 나이, 학력, 집안, 배경 등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다양성이 강조된 탈현대에서 내키는 대로 사용하기란 문제가 많을 터이다. 외부의 억압으로 애꿎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오해를 입었다면 절대 옳은 표현일 수 없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매몰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높은 곳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정치적 리더들에게는 이런 적합한 표현이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억지로 끼워 맞추지 않더라도, 세계고금의 숱한 리더들의 구태의연함을 보노라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한국의 근현대를 주물럭 거리고 농락했던 정치 리더들은 예외이겠는가.
한자로 풀어본 정치(政治)란 바르게 가도록 회초리를 들고 나라를 다스리다,는 의미를 가진다. 회초리를 가지고 다스린다,고 해서 백성 위에 군림하거나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부정의를 바로잡고 공의와 존엄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문자적인 의미로서 정치는 참으로 이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정치인들의 행태는 어떠한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설득의 3대 요소를 에토스(Ethos, 인품), 파토스(Pathos, 감성), 로고스 (Logos, 이성)라고 정의했다. 설득이란 사회 속에서 정치적 관계를 맺고 사는 인간들에게 기술을 넘어 존재 수단이다. 특히 사회의 리더로 자처하는 정치인들에게는 필수적 자질에 속한다. 가장 이상적인 설득은 에토스(인품) 60%, 파토스(감성) 30%, 로고스(이성) 10%을 말한다. 인품(에토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2400년 전 그리스 철학자의 가르침이지만 지금도 유효한 것 같다.
드디어, <길위에 김대중> 다큐영화가 애틀랜타에서 상영되었다. 영화관으로 향하면서 혹시 자리가 텅 비면 어떡하지, 하는 염려를 했다. 기우(杞憂)는 단지 기우로 끝나야 삶이 흥미로울 터. 영화관은 많은 인파로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영화는 한국 근현대사를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 보여 주었다.
국사책에서 배웠던 것과는 사뭇 다른 아래로부터의 역사라 해야 할 것이다. 세계적으로 왕권과 정부가 주도한 역사는 포장되기 마련이다. 돋보이게 하고 감추어야 할 것들을 조율한 맞춤 역사 같은 것이다.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을 테니. 대신에 <길위에 김대중> 영화는 불합리한 억압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눈물로 보인 역사를 그려내었다.
김대중이라는 한 사람의 주변에 발생했던 믿기지 않는 사건들이 어두운 한국 근현대사를 대변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근원을 알아차릴 수 없는 숱한 감정들이 울근불근하는 듯했다.
더없이 관객들을 눈물짓게 한 것은 16년 만에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찾은 고 김대중 대통령이 오열하는 장면이었다. 당시 한 대통령 후보의 가슴에서 복받쳐 오르는 눈물이었다. 당시 참석했던 사람들도 울고, 영화를 보는 우리도 울었다. 영화에서 흐르는 큰 감동은 <길위에 김대중>의 공감 능력이었다. 김대중, 그는 울 줄 아는 대통령이었다.
그의 눈물들은 국민의 마음을 녹여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득의 요소에 비추어본다면, 그는 사람의 됨됨이인 인품(에토스)이 된 정치인이었다. 인격이 된 사람에게 파토스(감성)와 로고스(이성)는 당연하지 않겠는가.
동시에 또 한 정치인의 눈물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기간 홍보영상에서 그가 흘리던 눈물이다. 그의 인간적인 면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국민들의 눈물에 자신도 공감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는 울 줄 아는 인품이 된 정치인이었다. 혹자는 눈물은 연기의 영역이라고 폄훼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눈물은 고귀해서 연기로 지속되기란 불가능한 것 같다. 한번 흘리고 두 번 흘리면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나고 말기 때문이다. 연기 이후에 태도와 언어, 삶과 방향이 그들의 진실성의 유무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공감의 눈물을 연기하기도 굉장히 어렵다는 것이다. 공감의 눈물이 없는 정치인들은 본래 국민을 이해하는 능력이 제로이다. 필시 시도조차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고로, 정치인의 눈물은 참으로 귀하다. 눈물의 코스프레도 여간해서 만나기란 쉽지 않다. 천종 산삼을 찾는 편이 나을지도. 그들의 눈물이 메말라서일까 아니면 고의적일까. 가령, 본래 눈물 없는 사람들이 정치인이 되는 것은 아닐지. 매우 서글퍼지는 부분이다. 곧 AI도 눈물을 흘리는 시대가 도래할 텐데 말이다.
한국의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 6일 후에 "사랑하는 아들딸을 잃은 부모님과 그 가족들이 마주하는 가늠할 수 없는 슬픔 앞에 가슴이 먹먹하기만 하다. 그 어떠한 말로도 이 슬픔을 대신할 길이 없는 것 같다"라고 했다. 대통령으로서 너무나 비통하고 죄송한 마음이며 큰 책임이 자신과 정부에 있음에 더욱 세심히 살피고 끝까지 챙기겠다고 약속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대통령으로서 마음이 무겁고, 슬픔을 가누기 어렵다"라고 했다. 이런 사과의 말로 약속을 했던 그가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1년 3개월 동안 질질 끌고 온 것도 모자라 거부하고 나셨다.
'마음이 무겁고, 슬픔을 가누기 어렵다'는 대통령의 말은 연극이었을까. '이해한다'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다.
이해한다
여흥구처럼
머리를 끄덕이며
'이해한다'
'이해한다'
이해理解란 무엇일까?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
머리를 통해 가슴까지 전달되는 것
가슴으로 느끼고 행동으로 보이는 것
빈번히
생각 없이
사용하기에 분주한
영혼없는 '이해한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느끼는 공감共感이 되어라
진심을 전달하기에
턱없이 부족하지 않을
후회없는 영혼의 공감이 되어라
['광야 위에 서다 그리고 광야에게 묻다' 중에서, 2017, 이상운]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과 참여자들은 '특별법' 통과를 위해 국회의사당 둘레길 3 km를 오체투지로 돌았다. 게다가 이태원역에서 대통령 집무실까지 1.4km 구간에서도 오체투지 행진을 했다. 끝내 묵묵부답의 대통령과 '특별법' 거부권을 건의한 여당을 비판하며, 유가족 11명이 추운 날 삭발식까지 했다. 왜 이런 지경까지 와야만 했나. 한국의 정치인들은 매번 보호받아야 할 무고한 사람들만 외딴곳으로 몰아세운다. 국가의 녹을 받는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고통은 국민의 몫이 되어야 하는가.
한 유가족 어머니인 박영수씨는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게 무섭다, TV에서 보는 정치인 얼굴도 무섭다, 아이 낳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아이들을 보낸 뒤 엄마들 눈물은 강이 됐고, 아빠들 한숨은 태산이 됐다. 정치인들은 강과 태산을 돌아본 적 있는가"라고 울분을 토했다. 마침내 대통령은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거부함으로 유가족들의 눈물, 고통, 뜻을 무참히 짓밟고 말았다.
맹자의 곡속장(觳觫章)에 이양 역지(以羊易之)란 말이 있다. 양으로 소를 대신한다,는 뜻이다. 눈앞에 보이는 '소'도 불쌍하게 여기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양'은 뻔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눈앞에 보이는 '관계'에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보이면, 보이지 않는 것도 동일한 씀씀이를 보일 것이라는 믿음이다. 맹자의 표현처럼 '무측은지심 비인간'(無惻隱之心 非人間)의 정치인들이 유독 많았던 한국이다. 따라서 정치인들에게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표현은 제격이지 않을까 싶다.
정치인들이여, 국민의 아픔을 이해하려는 마음은 있는가. <길위에 김대중>에게서 측은지심의 공감을 배우면 어떠한가. 국민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 눈물짓는 공감의 인품(에토스)을 가진 인간이 되기를 바라본다. 각자도생 대신에 진정한 '정치'를 하는 사람이 나오기를. 하나를 보면 다음이 기대되는 리더가 나타나기를. 측은지심을 상실한 리더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 꼭 기억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