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장을 보고 계산대 앞에 줄을 섰다. 새치가 드문드문 섞이고 배가 나온 중년의 백인 남자가 바로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아이보리 색 실을 그물처럼 엮은 작은 자루 세 개가 들려있다. 감자와 당근, 아보카도 몇 개가 자루마다 담겨 있다.
캐나다 마트는 국가 정책 상 비닐 쇼핑백을 제공하지 않는다. 돈을 내면 종이봉투를 판매하는 곳은 더러 있지만 그마저도 팔지 않는 마트도 있다. 무조건 개인이 장바구니를 지참해야 하는 환경이다. 하지만 원하는 개수나 무게만큼 과일과 채소를 담는 작은 비닐봉지는 마트 안에 비치되어 있다. 남자는 그조차 사용하지 않으려고 전용 주머니를 들고 온 것이다.
장바구니를 들고 오는 경우는 흔하지만 낱개로 파는 채소와 과일을 따로 담기 위한 자루까지 챙겨 오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환경을 생각하는 세심한 마음 씀씀이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생각은 나만 한 게 아니었다. 남자가 계산할 순서가 되어 물건이 담긴 주머니를 계산대에 내려놓자 나이 지긋하고 후덕한 인상의 여자 점원이 곧바로 칭찬을 쏟아냈다.
"주머니를 챙겨 오다니 정말 좋은 아이디어예요. 이런 건 도대체 어디서 구했나요? 파는 데를 알려주면 나도 당장 사겠어요."
"글쎄요. 어디서 샀는지는 몰라요. 마누라가 챙겨주는 대로 들고 왔을 뿐인 걸요. 비닐봉지에 물건을 담아갔다간 저녁도 못 얻어먹고 쫓겨날 거예요. 마누라가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철저하거든요."
남자의 말을 듣고 점원은 웃으며 말했다.
"환경을 생각하는 아주 멋진 아내를 두었군요."
"뭐 그런 셈이죠."
"그리고 당신은 좋은 남편이고요. 부인 말을 듣지 않는 남편이 무척이나 많답니다. 아주 잘하고 있어요. 계속 그렇게 하세요."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계산대를 떠났다.
올리비아는 올해 9월이면 다섯 살이 되는 꼬마숙녀였다. 올리비아의 도시락이 자주 눈길을 끈 것은 런치박스 대신 천으로 된 파우치가 크기별로 여러 개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크기가 남자 손바닥만 한 남색 파우치를 열어보면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가 들어있었고 작은 직사각형 모양의 미키마우스 파우치에는 간식용 팝콘 한 주먹이 들어있었다. 유니콘이 프린트된 보라색 파우치는 과일을 싸가지고 다니는 용도였는데 잘 뭉개지지 않는 단단한 과일, 예컨대 사과 한 알이나 포도 또는 방울토마토 몇 개를 싸오곤 했다.
올리비아의 점심 주머니는 여자들이 화장품이나 생리대를 넣고 다니는 천 파우치랑 다를 바 없이 생겼지만 식품 전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약간 빳빳한 재질의 천으로 만든 사각형의 납작한 주머니는 지퍼 없이 입구 쪽 넓은 시접을 뒤집어 여닫을 수 있는 구조로 안쪽은 방수 처리가 되어 있었다.
올리비아의 도시락은 각양각색의 파우치와 그 안에 어떤 음식을 담아가지고 왔는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다섯 살짜리 꼬마가 파우치에서 크루아상이나 작은 머핀 등을 꺼내 먹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자체로 앙증맞고 사랑스러웠다. 천 주머니에 싸 온 크루아상 한 쪽이라니! 너무 귀엽지 않은가!
올리비아의 엄마는 평소 딱딱한 인상에 말수가 적어 말을 붙이기 어려운 학부모였지만 환경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가 틀림없었다. 그녀가 싸주는 아이의 점심 도시락만 봐도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올리비아는 이미 충분히 똑 부러지고 영특한 아이였지만 자라서는 엄마와 똑같이 자연보호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의식 있는 성인이 될 게 분명했다.
캐나다 사람들은 자국이 소유한 천혜의 자연에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자연보호에 대한 시민 의식도 무척이나 높다. 대외적으로도 자연친화적인 나라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비즈니스와 접목해 활용하기 좋은 이미지다. 그런 이유때문에 메이드 바이 캐나다(Made by Canada)를 달고 있는 제품 치고 친환경과 내추럴을 모토로 삼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다.
캐나다는 공산품을 한국만큼이나 다양하게 자체 생산하는 나라는 아니지만 유독 친환경 관련 공산품, 이를테면 리유저블(reusable)이나 플라스틱 프리(Plastic free) 제품에 한해서는 생산, 판매하는 업체가 많다.
실리콘이나 스테인리스로 만든 빨대, 대나무로 만든 칫솔, 면포에 비즈 왁스를 발라 만든 천연 랩, 천으로 만든 식품 파우치와 실리콘 소재의 지퍼백, 비누와 샴푸바, 플라스틱 프리 세탁세제와 주방세제 등 품목도 다양하다.
몇 년 전 지역 중소기업 박람회에서 세탁세제를 압축 건조해 납작한 종이 형태로 만든 세제 한 팩을 구입했다. 호기심에 구입은 했으나 세척력같은 기능에 의심이 들기도 했다. 막상 사용해 보니 이런 신세계가 없었다. 세척력이 액체 세제에 뒤지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장점이 차고 넘쳤다.
플라스틱 용기를 배출하지 않는 환경적 이점은 물론이고 부피가 작고 납작해 커다랗고 무거운 세제통처럼 장소를 차지하지 않았다. 특히 끈적한 액체를 컵에 따르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세탁 용량에 따라 한 장이나 두장씩 떼어 세탁기에 넣으면 그만이었다. 무게도 몹시 가벼워 휴대하기에도 좋았다. 이런 세제 형태를 고안해 낸 건 거의 혁명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액체형 세탁 세제는 더 이상 구입하지 않게 되었다.
캐나다는 발달, 성장, 최첨단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나라다. 느려터진 행정 처리에 대한 불평이 산재하고 즐길 거리라고는 천혜의 자연 말고는 딱히 없으며 바로 옆 나라 미국과 비교해서는 한참 낙후된 변두리 시골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나다를 아우르는 전체적인 인상는 꽤 긍정적이다. 자연친화적이고 정치사회적으로 안정되었으며 시민의식이 높다는 평가다. 캐나다의 성숙한 시민 의식이란 거창한 철학이나 특출난 행동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예컨대 마트에 면 주머니를 챙겨가고 샌드위치를 천 파우치에 넣어 점심으로 싸 오는, 그저 소소하고 귀엽기까지 한 방법이다.
캐나다란 나라는 대체로 그러하다. 욕심 없는 소박함,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뚝심, 투박하지만 다정한 진심이 존재한다. 비록 느려터지고 촌스럽고 지루할지라도 캐나다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도 비슷한 글이 올라갈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