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 "아까 은행에서 전화 왔는데 카드 결제 금액이 부족하다고 지금 빨리 입금을 해야 한다는데 어쩔까? 뭐 비밀번호 앞자리를 알려달라고 하던데?"
나 : "그래서 알려줬어?"
엄마 : "알려줬지~."
나 : "엄마, 그걸 알려주면 어떡해!!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엄마 : "뭐 어때~ 그래봤자 통장에 훔쳐 갈 돈도 없는데 뭘~."
없는 걱정도 사서 하는 나와 달리 여든을 코앞에 둔 엄마는 늘 걱정이 없고 낙천적이라 그런지 크게 편찮으신 데 없이 정정하시다. 엄마가 건강하신 건 당연히 기쁜 일이지만 이렇게 대책 없이 '긍정 회로'를 돌릴 때마다 내 걱정과 한숨이 늘어난다는 게 문제다.
통장에 돈이 없다고 안전한 게 아니고, 중요한 개인정보를 알려주면 그걸 이용해서 엄마 앞으로 대출을 받아서 돈을 훔쳐 가는 게 요즘 세상이라고,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이상한 전화를 받으면 일단 '잘 모르겠다'고 하고 꼭 내게 먼저 물어보시라고, 마치 초등학생 자녀를 가르치듯 차근차근 설명하고 알겠다는 엄마의 확답까지 들은 뒤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은행에 다녀왔는지 여쭤볼 겸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엄마는 온종일 바빠서 은행은 못 갔는데 어제 '그놈'한테 다시 전화가 왔었다고 했다.
"아니, 그 웃기는 놈이 오늘은 비밀번호 네 자리를 다 알려달라더라~ 참나! 너랑 통화 안 했으면 다 알려줬을 텐데 내가 바쁘다고 하고 얼른 끊어버렸지! 잘했지?"
다행히 그 후로 더 이상 전화가 오지는 않았나 보다. 나는 엄마의 얘기를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벌렁벌렁 대며 진짜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큰일 날 세상이라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사실 얼마 전 나와 남편은 어처구니없는 사기를 당했다. 엄마에겐 세상 똑똑한 척 다하며 큰소리 치는 딸이지만 결국 헛똑똑이는 나였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도 못하고 속절없이 당해버린 우리는 자책과 수치심의 늪에서 아직도 허우적대는 중이다. 우리가 당한 사기의 전말은 이렇다.
치밀하고 계획적이었다
① 2023년 11월 9일 : "24년도 상'하반기 얼리버드 마라톤 사전 신청자모집" 광고 문자수신.
② 2023년 11월 9일 : 카카오채널 '모두의마라톤' 추가 후 구글폼에 사전조사 작성완료.
③2023년 12월 1일 : "모두의마라톤 사전조사자 접수 마감 안내" 문자 수신.
④2024년 1월 11일 : 2024 카카오톡 마라톤 사전 접수 안내 공지 수신.
⑤ 2024년 1월 20일 : "2024 얼리버드 마라톤 사전 접수 시작" 공지 수신(카카오톡).
⑥ 2024년 1월 23일 : 2024 카카오톡 마라톤 사전접수 링크 수신
⑦ 2024년 1월 23일 : 2개의 마라톤 접수 신청 후 참가비 입금완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맨 처음 받았던 광고 문자가 '개인 휴대전화 번호'로 발송된 것부터가 이상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나는 한번쯤 마라톤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 같다(심지어 나는 마라톤 도전 의욕이 앞서 광고 문자를 남편에게 전달하며 함께하자고 꼬드기기까지 했다).
변명 같지만 사전조사부터 신청까지 어찌나 계획적이고 정교한지 이 모든 것이 사기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모두의 마라톤'이라는 카카오 채널에는 8600명이 넘는 인원이 들어와 있었고, 4월부터 10월까지 8개의 주요 마라톤 대회를 안내하는 얼리버드 참가 신청서는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보였다.
그래서 4월에 5km, 6월에 10km 2개의 마라톤을 신청하고, 참가비 5만5000원을 입금하면서도 한 치의 의심조차 없었다. 의심은커녕 오히려 이제 진짜 내가 마라톤을 도전한다는 실감에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2월부터는 본격적으로 마라톤 준비를 하기 위해 생전 안 가던 헬스장에 가서 러닝머신 위를 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 신청했던 4월 마라톤이 정확하게 언제인지 확인하기 위해 경기마라톤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했는데, 바로 뜨는 팝업의 안내가 심상치 않았다.
'얼리버드 신청 사기 피해 주의 안내'라는 제목의 안내문에는 "카카오톡을 통한 얼리버드 신청을 유인하는 행위가 발생되고 있으니 참가자 여러분들의 각별한 유의를 부탁"하며 "경기마라톤 대회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서만 접수가 가능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참가신청 확인 란에 들어가 내 개인정보를 입력했지만, 신청은 돼 있지 않았다.
이럴 수가. 나는 얼른 '모두의 마라톤' 카카오 채널로 다시 들어가 봤다. 카카오톡 채널은 아직 살아있었으나 내가 보낸 메시지에 답하는 상담원은 연결되지 않았다.
나는 다시 포털을 열어 '모두의 마라톤 사기'라고 검색했다. 몇 개의 개인 블로그를 통해 우리가 '사기'를 당한 게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 순간 창피함과 허탈감, 분노와 치떨림이 한꺼번에 몰아쳐왔다.
그때는 내게 사기를 친 사람들보다 올해는 마라톤에 도전해 볼 것이라며 동네방네 소문냈던 내가 더 원망스러웠다. 이제 막 시작한 나의 2024년이 몽땅 망해버린 것처럼 느껴져 더욱 절망했다.
피해자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와 남편, 각 5만5000원씩 총 11만 원의 사기를 당했으니 금전적으로만 따지자면 큰돈이 아니라고 할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내가 느꼈던 수많은 감정들을 돈으로 환산하면 적어도 수천만 원은 될 것 같았다. 그러니 요즘 세상에 판을 치는 각종 피싱 범죄에 휘말려 수백수천만 원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마음은 오죽할까?
요즘 나는 '모두의 마라톤 사기 피해자'들이 모여있는 오픈 채팅방에 가입했다. 그곳에는 나처럼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함께 분노하며, 카카오톡 신고부터 경찰서 사이버수사대, 국민신문고 등에 신고하는 방법과 절차 등을 공유하고 있다. 사실 신고를 한다고 해서 사기당한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경찰서에 방문해야 하는 신고 절차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신고 대신 그냥 똥 밟았다는 심정으로 빨리 잊는 쪽을 택하는 것 같다.
하지만 어느 한쪽에서는 조금 귀찮더라도 다시는 같은 피해자들이 생기지 않도록 사기범들을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수백 건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이 복잡한 세상에서 1인당 5만~10만 원 정도 피해를 입었다는 몇 개의 목소리가 얼마나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목소리를 통해 더 이상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길 바란다.
또 하나 더 덧붙인다. 마라톤 대회에 참가를 신청할 때에는 반드시 '공식 홈페이지'를 이용하시길. 사설 업체가 사전 접수를 받는 등의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