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 되면 콘크리트 아파트로 빼곡한 도시의 골목에서도 찬란한 생명들이 저마다의 빛을 마음껏 발한다. 이른 아침 동생과 팔짱을 낀 채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봄빛을 만끽하며 걸었다. 수많은 계절의 담금질과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풍성한 자태를 키워온 꽃나무들의 절정을 감상하며 우리는 가볍게 필라테스센터로 향했다.
평소 운동과는 거의 담을 쌓고 살았다. 역할의 책임에 밀려 자기 몸을 돌보는 것을 소홀히 했던 탓에 건강상 큰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여전히 몸을 우선으로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몸이 보내는 신호에 둔감하기도 하거니와 코 앞에 밀려든 해야 할 일들을 잘 해내는 것이 내게는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신의 영역에서 탁월함을 유지하면서도 운동 하나쯤은 거뜬히 지속하는 벗들을 보면, 그들의 타고난 근면성과 에너지가 무척 부럽기도 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고 체온의 변화가 급격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난생처음 겪어보는 괴상한 통증들이 내 둔감한 통각을 비웃듯 온몸 구석구석 나타나기 시작했다. 양한방 병원의 도움을 이리저리 구했으나 증상은 한 달째 호전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주변 모두가 찝찝해하는 호르몬제를 처방받아 먹기 시작했다.
결국은 갱년기 호르몬의 장난질이었다. 호르몬제를 먹기 시작한 일주일 후부터 언제 그랬냐는 듯 컨디션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인간은 호르몬의 노예'라더니, 좁쌀 크기만 한 양의 호르몬이라는 물질에 지배되는 인체의 신비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당연했던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가는 것인가 보다. 그리고 지금까지 당연할 수 있었던 모든 일들은 그 자체로 '생명의 기적'이었음을 깨닫는다.
그제야 아버지의 서글픔이 어떤 것인지 어머니의 고단함이 얼마나 외로우셨을지 진정으로 공감하게 된다. 매일 새벽 가까운 약수터에 오르시고, 오후가 되면 자전거를 한 시간 이상 타시던 아버지가 팔순이 되던 해부터 기력이 떨어지기 시작하셨다. 그때부터 어렴풋이 비추시던 아버지의 상실감을 이제서야 조금 알겠다. 그리고 어머니... 30대 시절의 나는 일 속에만 파묻혀 내 어머니의 갱년기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 고단함을 외면한 채 여지껏 살아왔다. 그 무심했던 세월을 지나 어느덧 갱년기 나이가 되어버린 못난 맏딸인 것이다.
그래서 힘을 내기로 했다. 약에 의존하지 않고 내 당연한 일상을 지켜내겠다는 각오로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내 몸의 난감한 상태를 잘 알고 있기에 혼자서 배우는 과정을 등록했고, 한 시간 동안 온전하게 내 몸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의 추천으로 과감히 도전하긴 했으나 방방에 나무, 가죽, 스프링 등으로 디자인된 알 수 없는 장비들이 놓여있는 공간이 낯설고 무서웠다. 모르는 장치에 매달려 벌벌 떨며 고문당하는 모습이 저절로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공간이든 사람이 함께한다. 아무리 좋은 기능을 가진 사물이나 장치가 있다 해도 그것에 생명을 부여하는 건 사람이다. 그 사물의 가치와 기능을 잘 아는 사람이 함께하기에 우리는 낯선 공간, 새로운 사물과도 친숙해질 수 있다.
순간순간 자신의 한계를 만나는 나에게 초연히 집중할 수 있도록 중심을 잘 잡고 평온하게 지켜주는 선생님을 만났다. 체육을 전공하고 코치자격을 얻었으나 일을 하는 과정에서 인체에 대한 이해가 더 필요함을 절감하고 물리치료사 공부를 마친, 사람의 몸에 대한 탐구를 지속하는 겸손하고 열정적이며 진정성으로 무장한 선생님과 인연이 되었다.
그분과 함께하며 새로운 공간에서 느리게 지나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50분의 시간이 작은 산 하나를 오른 것과 같은 밀도 있는 시간으로 채워지고 있다.
우리의 삶은 그럭저럭 잘 흐르는 것 같다가도 수시로 크고 작은 도전을 맞게 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 시간을 함께 걸어가 줄 누군가를 새롭게 만나기도 한다. 생의 변화를 맞는 또다른 변곡점에서 같이 걸어가 줄 새로운 안내자를 만났다. 그분과의 동행으로 당연하게 여겨졌던 많은 것들을 건강하게 지속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 기운으로 아버지의 서글픔을 따스하게 보듬고, 어머니의 고단함을 오래도록 덜어드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
좋은 건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해야 한다. 2주 전부터 동생과 둘이서 커플 지도를 받고 있다. 얼굴도 성격도 너무나 다른 우리 자매는 필라테스를 함께하며 빼도 박도 못하는 자매임을 깨달아 가고 있다. 체형도 근력도 유연성도 어찌 그리 닮았을까! 부들부들 떨리는 팔과 다리를 지탱하며 웃기도 울기도 하는 지금 이 순간, 봄 햇살을 가득 머금은 창가의 새하얀 커튼이 투명하고 향기롭게 팔랑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