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의 최고의 놀이는 예술행위"라는 말이 있다.
4월 16일부터 열릴 오광해 개인전에 출품되는 <산수> 연작은 현실 산수를 그린듯하지만, 상상화이고 관념화이다. <모란촌> 연작도 그러하다. "목단의 형상을 빌어 배산임수, 좌청룡, 우백호를 그린 산수 <모란촌>도 현실에 없는 지형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이 작품들은 작가가 생각하는 이상적 세계, 마음속 풍경이 표현된 것이다. 그림은 결국 작가의 말대로 "자신의 세상을 발현"하는 것이다. 관념산수는 마음 속 진경산수이다.
'모란촌'에서 '촌'은 마을을 의미한다. 그러니 '모란촌'은 모란 꽃 같은 형상의 마을이라는 것이다. 모란 꽃 한 송이 안에 한 마을이, 한 세계가 들어있다고 본 것이다. 꽃 하나에 우주가 들어 있는 것이다. 모란꽃으로 된 마을이니 이 마을에는 다툼도 없고, 경계도 없으며 자연과 인간 모두가 어울렁더울렁 어깨 걸고, 서로 스미고 넘나들며 아름답게 사는 이상향, 선계의 어디쯤이 아니겠는가? 안개 자욱한 저기 어디쯤에선 선녀들이 하늘하늘 날아다니듯 하다.
꽃 한 봉오리에서 세상을 보다
<산수 3>, <산수 4>, <산수 5>의 풍경은 위도 아래도 없으며 고착되어 있지 않고 구름 위에서 부유하듯 한 바위 풍경이다. <산수 3>은 풍경 같지도 않다. 관념산수의 극은 형상을 잃는다. 형태를 초월하는 것이다. 형상이되 무엇을 가리키는 형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산수화이지만 동시에 추상화다.
특정한 무엇인가를 금세 알아차릴 수 없는 상황으로 넘어가면, 관자의 상상력은 증폭되어 보이는 형상으로 각자의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다양한 선과 먹의 농담으로 발생하는 기기묘묘한 이미지에 온갖 의미를 발생시키게 된다. 그 오만 감정들과 서정적 자극은 관자의 머릿속에서 자연 발생하게 된다.
나에게 <정물 2>는 에로틱한 어떤 형상으로 다가온다. 다시 말해 <산수>, <정물> 연작들은 구체적 사실적 묘사를 떠남으로 오히려 온갖 풍경과 온갖 사건의 결집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 지시체를 넘어서면 한 사물은 하나의 세상을 품을 정도로 무한정의 열림을 갖게 된다. 어떤 무엇이 아니기에 어떤 무엇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작가 처지에서 보면 구체적 형상을 넘어 추상에 이르게 되면 그리는 과정, 그 행위가 중요해진다. 그 행위를 하는 그 상태의 인식, 심상, 존재가 중요해진다. 그러면 작품이 "바라보는 나와 대상과의 인식장으로 존재"(강선학)하게 된다. 그림이라는 행위로 세상과 교감하며, 본능의 즐거움을 쫓으며, 존재함의 의미를 음미하는 것이다.
먹의 농담으로 즐기는 농익은 농담
<山水火(산수화)>란 작품은, 작품 제목에서부터 '언어유희 농담'을 즐기는 평소 작가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그림 '화'자가 아니라 불 화자를 써서 익살을 부린 후 그림은 불타는 산수를 그린 것인지, 불 모양을 한 산수를 그린 것인지를 분간할 수 없게 만드는 그림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씨익 웃으면서 그렸을 것 같다.
<산수(호우)>(2022) 작품은 물벼락이 쏟아지는 호우 현장을 맞닥뜨리는 것 같다. <산수(산사태)>(2022) 작품은 커다란 돌들이 굴러떨어지는 듯한 산사태 그림이다. 실제 호우와 산사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동시에 얼핏 추상화 같아서 형상보다 그 자유분방한 붓질과 자유로운 먹의 농담에 눈길이 가게 된다. 그 변화무쌍하면서도 통일된 조형미는 흥 돋는 미적쾌감을 준다.
그림으로 쌓아 올린 기교가 아니라, 칠십 가까이 살면서 자연스레 생긴 지혜로움으로 이제야 먹으로 밀고 당기며 놀 줄 알게 되었다. 형상이라는 틀에서 구애받음이 없이 자유로워졌다.
무엇이든 그리고 있다는 그 자체만의 즐거움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놀이가 예술이다. 요즈음의 작품을 보면 작가는 그 예술 놀이의 즐거움에 흠뻑 젖어 있는듯하다.
'소나무 화가'였던 행위미술가... 현대미술-전통미술 넘나들기
오광해는 과거 '소나무화가'로 불릴 정도로 소나무를 중점적으로 그려왔다. 작품 제목에 소나무가 있던 지명을 표기할 정도로 수려한 수형을 가진 소나무를 찾아다니며 소나무를 성실히 묘사하는 진경, 실경산수 개념의 소나무를 그리는 작가였다.
작가는 1987년부터 행위예술 판이 열리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행위미술을 관람하는 국내에서 가장 열성적인 행위미술 애호가였다. 전통미술 작가와 실험예술이자 전위예술인 행위미술의 기묘한 동거는 2013년 기존의 소나무 그림의 변화를 불러온다. 형체의 견고성이 무너지고, 소나무이자 소나무가 아닌듯한 소나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묘사에서 관념산수로의 이동인 것이다.
그 관념이 '개념 놀이'인 행위미술과의 만남 결과가 아닌가 하다. 소나무 줄기가 붉은색으로 표현되고 공간을 부유하는듯한, 얼핏 추상화 같아 보이기도 한 <혈맥>(2013)이란 작품이 이 당시의 작품이다.
그렇게 행위미술가들과 함께 어울리다가 결국 2015년 3월 직접 행위발표를 하기에 이른다. 2015년 10월 한 달간 [유라시아 횡단 퍼포먼스 프로젝트 "동방으로부터"]에 다녀온 후 결과보고전에 전통 한국화와는 전혀 다른 식도에다 그림 그린 <분단> 같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이다.
전통 수묵화를 하던 작가의 생뚱맞다 싶은 다음 두 작품은 기록해둘 만하기에 소개한다. <분단>(2016)은 식도 날 위쪽에 태극기와 인공기를 양분해 그리고 손잡이에는 성조기와 러시아 국기를 양분해서 그려 놓았다. 분단 상황의 원인제공자이자 지금도 그 분단이 고착, 유지되기를 바라는 미국과 러시아가 손잡이에 그려져 있는 깜찍한 발상의 작업이다.
뼈 있는 농담처럼 묵직한 여운을 준다. 시퍼런 날의 식도로 자신들의 이익에만 목매는 인간들을 근엄하고 격조 높게 일갈하는 것이다. 이 작품이 제스퍼 존스의 성조기 작품과 견주어 크기만 작다뿐이지 그 감동에는 모자람이 없다.
<일도양단>(2016)은 날이 살아 있는 식도의 날 윗면에 흰색과 검은색을 양분해 그려 놓은 작품이다. 흑백논리나 이분법으로 쉽게 재단되고 편 가르기를 하는 세상에 대한 통쾌한 일갈이다. 이 작품은 판단이나 결정에서 단칼에 두 가지로 양분해버리는, 편 가르고, 차별하고, 적대시하는 무도한 이들에게 간단한 그림으로 딱딱한 통념의 목덜미를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다.
행위미술가의 실험적 사고와 전통적 표현기법의 만남은 위에 언급한 것처럼 '개념 놀이'에 가깝고, 어떤 틀도 넘어서고자 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놀이터인 행위미술이 형상을 밀어내고 관념산수 놀이를 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이제 하루하루 늙어감을 느끼는 나이에 이렇게 예술 놀이를 즐기며 여생을 즐기는 것이 '잘 사는 것'(참살이)이고 '잘 죽는 것'(웰다잉)을 준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 전시는 8년 만에 이루어지는 개인전이다. 음악을 사랑하고, 예술을 좋아하는 한 낭만파 예술인의 농익은 붓질, 먹의 농담으로 펼쳐놓은 예술 놀이의 결과물을 보면서 일상의 신선한 환기를 가지시기를 원한다면? 4월 16일부터 4월 30일까지 기린미술관(전주)을 찾으시기 바란다. 40여 점의 작품이 여러분을 반길 것이다.
언어유희를 즐기는 작가의 최근 농 한 마디를 기록해둔다.
"이젠 일찍 죽기(요절)엔 너무 늦은 나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