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성 60 대 반대 0, 학생인권조례 폐지안 가결.
26일 오후 서울시의회 본회의 마지막 표결에서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되자, 서울시의회 본관 앞은 아수라장이 됐다. 조례 폐지에 반대하는 청소년들은 회의를 마치고 본관을 빠져나가는 시의회 의원들을 향해 "당신들이 어떻게 의원이냐", "부끄러운 줄 알아라"라며 고성을 지르며 항의했다. 한 청소년이 의원들에게 피켓을 들고 다가가자 경찰이 제지하는 등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본회의에 앞서 '학생인권법과 청소년 인권을 위한 청소년·시민전국행동',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등 시민사회단체는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 본관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특별시 학생인권조례 폐지 조례안(폐지안)'의 본회의 상정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
폐지안이 통과된 후에도 이들은 '인권은 폐지할 수 없다', '학생인권 짓밟는 국민의힘 아웃'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학생인권조례 폐지하는 서울시의회 규탄한다" 등 구호를 외쳤다. 반면 폐지안에 찬성하는 단체들은 의원들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며 환호와 박수를 보내는 등 현장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권리가 없어졌단 말을 어떻게 전할지..."
이날 본회의 전부터 서울시의회 앞에서는 학생인권조례 폐지안 규탄 발언이 이어졌다.
수도권 고등학교에 다니는 수영 청소년인권모임 내다 활동가는 "학생인권조례는 탈가정 청소년, 이주배경 청소년 등 모든 학생들의 존엄성과 가치를 실현하고자 만들어졌고 지난 10여 년 동안 반인권적 차별로부터 학생들을 지키는 마지노선으로 기능했다"라며 "학생의 존엄함은 법과 조례로 지켜져야 하며 인권은 어떠한 경우에도 폐지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남다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활동가는 "10여 년 전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운동에서 학생도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고, 폭력과 차별 없는 학교를 함께 만들어달라고 하루도 빠짐없이 거리로 나와 외쳤다. 학생인권을 짓밟으려는 시도를 멈추라고 수없이 얘기했다"라며 "얼마 전 세월호 참사 10주기가 있었는데 학생인권조례 폐지는 또다시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얘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연대하는교사잡것들 소속 교사인 조영선씨는 "12년 전 담임을 맡으면서 학생들을 차별하지 않고 귀하게 여기는 학교를 만들고자 서명지를 학교통신으로 보내며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었다. 국민의힘 위원 몇 명이 쉽게 폐지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조례가 폐지되면 '이제 학생들에겐 권리가 없고 학생인권은 침해될 수 있다'는 말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울먹였다.
중학생 자녀를 둔 백운희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는 "국민의힘 소속 시의회 의원들은 이날 오전 여당 의원으로만 구성된 특위(인권·권익향상특별위원회)에서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는 안건을 의결했다"라며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폭력과 위험으로부터 안전해야 한다는, 과도한 선행학습을 요구해선 안 된다는 조례 내용에 어떤 문제가 있단 말이냐. 서울시의회가 없애야 할 건 학생인권조례가 아니라 이를 그릇되게 바라보는 시선들이다"라고 지적했다.
같은 시각 학생인권조례 폐지에 찬성하는 학부모들도 서울시의회 본관 맞은편에서 맞불 시위를 진행했다. 서울학생인권조례폐지범시민연대, 학생인권조례폐지전국네트워크 등 단체 회원들은 기자회견 참석자들을 향해 '학생들에게 동성애와 성전환을 조장한다', '정상적인 학생을 혐오차별자로 만든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어 보이며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주장했다.
"묻지마 폐지" 비판에도 가결... 조희연 발언은 '거부'
학생인권조례 폐지는 특위를 거쳐 본회의까지 하루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서울시의회 인권·권익향상특별위원회는 이날 오전 11시 20분께 제323회 임시회 제4차 회의를 열고 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을 안건으로 상정해 처리했다. 여당인 국민의힘 위원 10명이 모두 참석해 10분도 채 안 돼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서울시의회 곧장 오후 2시에 본회의를 열어 오후 3시 30분 폐지안을 가결했다. 올라온 38건 중 마지막 안건이었다. 찬성 60 대 반대 0 대 기권 0, 가결. 학생인권조례가 서울에서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서울시의회 전체 112석 가운데 76석은 국민의힘 소속이다.
여야는 표결에 앞서 찬반 토론으로 강하게 맞붙었다. 서울시의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이소라 부위원장(더불어민주당)은 "특위는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위한 친위대로 전락했고, 폐지라는 답을 정해놓은 상황에서 어떠한 민주적 절차도 무용지물이었다. 시의회는 결국 '묻지마 폐지'라는 폭력적 결론에 도달했다"라며 "지난 12년간 학교 현장에 안착한 인권 친화적 문화와 민주주의의 퇴행이 불 보듯 뻔하다. 학생인권조례 폐지는 학생들을 다시 통제의 대상으로 여기자는 것이며 오늘이 서울시의회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 참담하다"라고 말했다.
한편 서울시의회 인권·권익향상특별위원회 소속 김혜영 부위원장(국민의힘)은 "학생인권조례는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등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것들을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 포함시켜 불필요한 논란을 지속시켰다. 학생의 책임과 의무를 빠뜨린 채 권리만 명문화하는 등 폐해와 문제점에 대한 지적도 쏟아지고 있다"라며 "폐지안이 계류된 지 1년이 넘은 만큼 서울시의회는 해당 안건 처리를 지체하거나 미뤄서는 안 된다"라고 맞받았다.
김 위원장은 또 본회의에 참석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을 향해 "서울시의회 주도로 추진되는 폐지 움직임에 반발하며 1인 시위에 나서는 등 반대 의사를 명확히 드러냈다"라며 "학생인권조례를 인정한다면 기업인, 소상공인, 의사, 변호사 등 특정 집단을 위한 인권조례 제정도 용인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토론이 끝나고 표결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의원들 사이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표결에 앞서 본회의장 첫 줄에 앉아 있던 조 교육감은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김현기 서울시의회 의장에게 두 차례 발언을 신청했으나 김 의장은 "안건에 대한 발언은 의원만 할 수 있다"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건 상정과 토론을 거쳐 표결에 이르기까지 30분간 논의 끝에 학생인권조례는 끝내 폐지됐다.
충남 이어 두번째... "혐오 세력 대변" "재의 요구"
서울시의회 앞에 대기해 있던 학생·교사·학부모 등은 폐지안의 시의회 통과 소식을듣자 큰 소리로 항의했고, 일부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는 "조례안이 있어도 학생인권이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는데 조례안이 폐지되면 학생인권이 얼마나 제대로 보장될 것 같냐. 지방의회가 특정 혐오 세력의 대변인이 된 것이 부끄럽지 않냐"라고 분노했다. 공현 투명가방끈 활동가도 "학생인권조례는 폐지됐지만 학생들의 인권은 여전히 존재한다. 재의 요구를 비롯해 학교 현장의 부당한 폭력과 인권침해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의장은 지난해 3월 주민조례청구를 받아들여 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을 이미 한 차례 발의한 바 있다. 서울시의회는 그해 12월 폐지안을 교육위원회에 상정하려 했으나, 서울행정법원이 폐지안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면서 심의·의결이 무산됐다. 하지만 이날 조례안이 특위안으로 다시 채택돼 본회의에서 가결되면서, 서울시는 지난 24일 충남에 이어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되는 두 번째 사례가 됐다.
학생인권조례는 지난 2010년 경기도를 시작으로 서울·광주·전북·충남·제주·인천 등 전국 7개 시도에서 도입됐다. 학생들의 인권과 자유, 행복한 삶을 보장한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최근 학생인권조례가 교권 하락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폐지 여론에 힘이 실렸다. 지난해 7월 서울 서이초 교사 사망 뒤 윤석열 대통령은 교권 강화를 위해 학생인권조례 개정을 지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