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경찰 과잉진압은 미국 같은 다른 나라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 경찰과 서울교통공사가 이동권을 요구하는 신체장애인들을 지하철역에서 끌어내고, 시위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행사에 경찰을 배치하는 것 같은 과잉진압 장면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혜화역을 점령한 경찰
지난 19일 혜화역 근처 마로니에공원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가 주최한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집중결의대회가 열렸다. 오후 7시쯤 혜화역에서 내렸을 때부터 평소와 다른 풍경이 눈에 띄었다. 몇십 명은 되어 보이는 경찰들이 마로니에공원과 가까운 3번 출구로 가는 통로에 서 있었다.
벽에는 "철도 종사자의 허가 없이 연설, 권유 행위를 할 수 없다"고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질서유지선이라고 쓰여 있는 이동식 철제 울타리도 있었는데, "특정 장애인 단체의 불법시위로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전장연 시위를 겨냥한 내용으로 보였다. 막상 시위하는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폭력이 벌어지는 것도 아닌데 범죄 현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혜화역 통로를 지키고 선 경찰들을 보면서 불편했다.
장애인 차별과 성차별을 평생 겪고 살았기에 강압적인 해결책에 대한 반감이 크다. 권력과 대치하는 상황에 대한 공포도 크다. 힘을 가진 사람과 충돌하면 거의 대부분 소수자인 나에게 불리한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날 경찰들을 보면서 직접 항의했다가는 트집을 잡혀서 연행되거나 더한 일을 당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이 올라왔다.
마로니에공원에 도착했을 때도 경찰들이 잔뜩 보였다. 출입구마다 경찰이 서 있었고, 내가 들어간 넓은 출입구에서는 경찰 한 명이 공원에 들어가는 시민들을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었다. 경찰차도 여러 대 있었다.
공원 안쪽에서 라이브 공연을 봤다.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자막과 수어통역을 제공하는 행사는 처음이었다. 청각이 예민해서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쓰고 있었는데도 실시간 자막이 있어서 공연 내용을 따라갈 수 있었다.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출구만 골라 봉쇄
근처에서 간식을 먹고 쉬다가 오후 9시쯤 마로니에공원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혜화역 3번 출구에서 큰 소리가 들려서 가까이 가봤더니 경찰이 출구 계단에 빽빽하게 서서 장애인 활동가들을 막았다. 근처에 있는 엘리베이터도 경찰 4명이 입구에 서서 사람들이 이용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휠체어를 탄 신체장애인들이 "집에 가게 해 달라"고 경찰에게 여러 번 항의했지만 경찰은 물러서지 않았다. 건너편 출구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비장애인에게는 길을 비켜준 경찰
그 와중에 비장애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2번 출구 계단으로 올라가려고 하자 경찰이 길을 열어주었다. 에스컬레이터만 있어서 휠체어 사용자가 접근할 수 없는 출구는 봉쇄하지 않고 남겨두었다.
경찰이 막지 않은 출구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역사 안으로 내려갔다. 이때 대합실에서 경찰과 지하철 보안관이 휠체어를 탄 신체장애인들을 둘러싸고 강제퇴거시키는 장면을 봤다.
신체장애인 한 명을 경찰과 지하철 보안관 여러 명이 둘러싼 채로 퇴거를 종용했다. 휠체어에 탄 신체장애인 여성이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여러 번 항의했다. 역 관계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알아서 퇴거하시라, 계속 차시면 다친다"고 했다. 그 다음에 "어, 어, 휠체어 쓰러진다, 잡아"라는 말과 함께 무거운 물체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압 과정에서 휠체어가 넘어진 것이다.
혜화역장이 나와서 마이크를 들고 "특정 장애인단체"는 "불법행위를 즉시 중지하고 역사 밖으로 퇴거"하라는 안내방송을 했다. 퇴거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나서 경찰과 지하철 보안관들이 신체장애인들을 끌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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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체장애인을 둘러싸서 강제퇴거시키는 혜화역 관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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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서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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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인 인권 기준에 어긋나는 과잉진압
경찰과 서울교통공사가 신체장애인들을 퇴거시킨 방식은 국제적인 기준에 어긋난다. 유엔 자유권 규약 위원회(United Nations Human Rights Committee)가 지난 2020년에 발표한 일반논평 제37호(평화적 집회의 권리)는 "법 집행 공무원이 어느 구역의 집회 참가자를 에워싸고 가두는 방식인 봉쇄와 '주전자 전술'(Kettling)은 폭력이 발생했거나 발생할 즉각적인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만 상황에 비례하는 강도로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경찰과 서울교통공사는 신체장애인 개개인을 경찰이나 보안관 여러 명이 둘러싸서 퇴거시켰다. 과잉진압이다. 일반논평 제37호는 "무차별적 또는 징벌적인 봉쇄가 진행될 경우 평화적 집회의 권리가 침해되고, 정당한 사유 없이 억류되지 않을 자유와 이동권 같은 다른 권리도 침해될 수 있다"고도 지적한다.
하지만 이날 경찰은 신체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출구를 모두 봉쇄해서 시위에 참가한 신체장애인들이 이동하지 못하게 막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이나 키아이 (Maina Kiai) 유엔 집회 결사의 자유 특별보고관은 2016년 보고서에서 "경찰이 (시위에 참가한) 장애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거나 보조 기기를 빼앗아서 시위 참가를 방해한다"고 지적했고, "당국이 장애인과 그들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보조기기와 상호작용할 때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강제퇴거 과정에서 경찰이 장애인 여성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고, 신체장애인이 탄 휠체어가 넘어졌다는 점에서 봤을 때 경찰과 서울교통공사는 이 권고사항도 지키지 않았다.
지하철을 탈 수 있는 장애인이 본 이동권 탄압
나도 장애인 차별 때문에 다 나열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피해를 봤다. 자세히 적고 싶지는 않지만 비장애인이 들으면 기겁할 만한 일들이 나에게는 일상이다. 하지만 나는 눈에 띄는 신체장애가 없기 때문에 비장애인들 틈에 섞여서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다. 체력이 떨어져 교통약자석에 앉아서 가고 싶을 때는 따가운 시선이 두렵지만, 장애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했던 적은 없다. 경찰이 중증 신체장애인들을 지하철 역사에서 끌어내던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마로니에공원에 갔고, 경찰의 봉쇄가 풀리고 나서는 혜화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갈 수 있었다.
만약 내가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면 이날 저녁 혜화역에서는 절대 지하철을 탈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시위를 하러 왔다고 생각한 역 관계자들이 나를 지하철 역사에서 끌고 나갔을 수도 있다. 다른 역에서도 비장애인이나 신체장애가 없는 장애인이라면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장벽들을 뚫고 나가야 간신히 지하철을 탈 수 있을 것이다.
경찰과 서울교통공사가 저지른 과잉진압의 본질은 권리를 요구하는 약자를 겨냥한 혐오다. 장애인을 이렇게 대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라면 누구라도 취약한 상황으로 내몰렸을 때 폭력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비마이너에 독자투고했습니다. 에이블뉴스에도 투고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