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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8명의 서명을 받아 제출된 옛 탐라대 부지 활용방안에 대한 숙의형 정책개발 청구건이 지난 14일 제주도 숙의형 정책개발청구 심의회'에서 각하됐다. 필자 역시 탐라대부지 활용방안에 대한 숙의형 정책 청구 서명인으로 이름을 올렸었고, 각하되기까지 과정을 면밀히 살펴봤다.

이 청구의 근거 조례는 '제주특별자치도 숙의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주민 참여 기본 조례'(아래 숙의민주주의 조례)로 행정안전부 주관 지방의회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행정의 민주성과 투명성 확보를 위해 정책 결정 과정에서 주민들 청구를 통해 주민이 참여하는 숙의민주주의를 보장한 전국 최초 조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 청구 건 외에도 앞서 청구된 안의 처리 과정을 보면 최우수상에 빛나는 이 조례의 민낯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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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지방의회 우수사례 경진대회서 최우수상 수상한 숙의민주주의 조례 .
ⓒ 제주특별자치도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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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인 참여 배제하다가... 하루 전날 참여 통보

오영훈 제주도지사는 수소산업, 우주산업, 도심항공교통(UAM)을 추진하기 위해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세 가지 사업 모두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사업이며 도민들에게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가져다주기 어려운 사업이다. 옛 탐라대 부지에 계획되고 있는 하원테크노 캠퍼스는 오영훈 도지사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사업이다.

이에 대해 도민 공론화를 요구하는 내용으로 3월 18일 옛 탐라대 부지 활용방안에 대한 숙의형 정책개발 청구서가 제출됐다. 청구서 접수 후 사업추진을 담당하는 제주도 우주모빌리티과가 '사업계획이 확정돼 추진 중'이기에 청구 대상이 아니라고 반려했다.

이에 대해 청구인들은 '하원테크노 캠퍼스 조성 기본계획 고시를 진행하지 않았'고 '산업단지 용도변경을 위한 사전 절차인 전략환경영향평가 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기에 사업계획이 확정됐다고 볼 수 없다면서 이의신청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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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의신청서 제출하는 청구인 측 .
ⓒ 김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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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인들은 이의신청 건에 대한 심의가 진행되기 하루 전날 '제주도는 심의위원들에게 해당 사안에 대한 충분하고 객관적이며 공정한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지만 지금은 청구인들이 취지를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배제하고 일방적인 회의를 개최하려 하고 있다'면서 청구인들의 거듭된 심의회 참석 요구를 수용하지 않은 제주도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청구인들은 회의 불참 의사를 밝혔다?

지역 언론들이 성명 내용을 기반으로 기사를 내보내자 담당 부서는 의장인 김성중 행정부지사가 허락했다며 회의 전날 오후 늦게 청구인 측 참석을 요구했다. 이에 청구인들은 회의 직전 참석 제안이 부적절하며 자료 준비와 발표 준비 등의 시간 여유를 달라며 회의 연기, 혹은 회의 추가 소집을 요청했다.

하지만 5월 14일 심의회는 회의 연기나 추가 소집 없이 진행돼 청구 건을 각하했다. 회의록을 보면 심의회 담당부서는 청구인 측은 '시간이 촉박해서 참여할 수 없다는 연락이 왔다'고 왜곡 전달한다.

심의위원 중 1인이 '충분한 자료 검토를 하고 청구인들 얘기도 한 번 들어보는 회의를 한번 거친 후에 결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의견을 냈지만 의장은 '다시 심의회를 여는 것은 적절치 않고 어쨌든 재적위원 9명이 참여해서 위원회는 성립되었기 때문에 오늘 이의신청에 대한 인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추가 회의 개최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다른 의원은 '제주가 기본 1차, 3차 산업을 제외한 부분에서 가질 수 있는 성장성과 미래상, 그리고 우리가 추진할 수 있는 굴뚝이 없는 공장을 만들어서 우리가 발전할 수 있는 그런 방향까지 설정한다면 저는 개인적으로 위원회 운영상 다소의 문제점이 사전에 분명히 있었다는 것은 이해는 되지만 이 결론에 있어서는 제가 보기에는 지금 상황에서는 추진이 맞다'며 하원테크노캠퍼스 사업 추진을 주장했다. 이의신청을 인정할 것인지 다루는 회의 취지에 부적합한 발언으로 평가된다.


이날 사업부서인 혁신산업국장과 우주모빌리티과장은 해당 사업의 취지 등에 대해 화면 자료를 준비하여 발표했고 심의위원들의 질의에 긴 시간 충실하게 부서 입장을 설명했다.

이슈가 있는 사안을 다룰 때 사회 전반의 합의 형성을 위한 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건은 충분하고 균형 잡힌 정보 제공이다. 한 쪽의 일방적인 정보만 제공된 이 날 심의회는 이 요건을 충족했다고 볼 수 있을까?

숙의민주주의 청구건은 2017년 관련 조례 제정 이후 단 세 차례 제출되었으며 앞서 두 차례 역시 모두 조례 취지에 근거했을 때 심각한 문제를 노출했다.

영리병원 공론화조사 결과 거스른 원희룡 전 제주도지사

2018년 2월, 1069명의 서명과 함께 제주영리병원에 대한 숙의형 정책개발 청구건이 제출됐다. 이 사안에 대한 공론화 절차가 결정됐고 당시 원희룡 전 제주도지사 역시 논란 많은 영리병원 허가 여부를 공론조사로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200명의 도민이 배심원단이 구성되어 두 차례의 숙의 토론이 진행되었고 배심원단은 최종 조사에서 '영리병원' 개원 반대 58.9%, 찬성 38.9% 큰 격차로 개원 반대 의견을 냈다. 공론화조사위원회 역시 이 결과를 토대로 제주도지사에게 '녹지국제영리병원 개설 불허'를 권고했다.

하지만 원희룡 전 제주도지사는 공론조사로 결정하겠다는 자신의 약속뿐 아니라 공론화조사위원회의 권고를 모두 뒤집고 2018년 12월 5일 내국인진료 제한이라는 조건부로 국내최초 영리병원 개설을 허가했다. 이렇게 조례는 쉽게 존재 이유를 잃었다.

편중된 세대 구성으로 문제된 들불축제 공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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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불축제 공론화청구 기자회견 .
ⓒ 김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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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남아있던 숙의민주주의 조례를 2023년 4월 제주녹색당이 다시 끄집어냈다. 기후위기 및 전 세계 산불로 오름 태우기에 대한 적절성에 대한 논란이 컸던 들불축제에 대해 749명의 서명을 받아 숙의형 정책개발을 청구한 것이다.

원탁회의 방식의 숙의형 정책개발이 결정되었지만 졸속으로 치러지는 과정에서 원탁회의 참여단 구성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제주녹색당은 '참여단은 최소한 성별, 연령별, 지역별 전체 인구비를 고려해 구성'해야 하는데 '성별, 연령별, 지역별 구성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연령별 구성이 엉터리였다'고 비판했다.

제주녹색당이 문제삼은 참여단 구성을 살펴보면 60대 이상의 시민이 51.3%를 차지하였고 만 18세 이상 20대의 경우에는 단 2명, 1.07%를 차지했다.

원탁회의가 구성되기 전에 청구인들은 사업담당 부서에게 검증위원회 구성을 요구했지만 검증위원회는 구성되지 않았다. 1억1000만 원가량의 예산으로 평일 낮 시간대 1회 진행된 들불축제 원탁회의가 내실을 가질 수 있었을는지는 의문이다.

숙의민주주의 조례는 대의민주주의 체계를 보완하면서 주민의 직접 참여, 행정의 민주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제주에서 진행된 세 차례 실험은 도지사와 행정이 쉽게 조례를 무력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심의회의 독립성 등 조례의 근본 취지를 살리기 위한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덧붙이는 글 | 글쓴 이는 제주녹색당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태그:#공론화, #숙의민주주의조례, #오영훈제주도지사, #한화우주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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