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로 했던 기사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았다. 아이 방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의자에 앉아서 글을 쓰는데 문득 방바닥으로 시선이 향했다. 순간 나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봐 버렸다. 여기저기 떨어진 머리카락들... 한두 개가 아니다. 너무 눈에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다. 물티슈를 몇 장 뽑아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바닥을 닦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서 앉아서 노트북을 째려보고 있노라니, 저녁 먹고 먹어야 할 약을 먹지 않은 것이 떠오른다. 지금 당장 먹지 않으면 또 까먹어서 못 먹을 것만 같다. 부엌으로 가서 컵에 물을 담고 약을 먹었다. 그런데 먹고 나니, 자연스럽게 싱크대에 쌓여있는 설거지가 보인다.
'몇 개 안 되니 어서 해치워버리자' 싶어 후다닥 설거지를 하고 나니 갑자기 힘이 든다. '휴~ 좀 쉬어야겠다. 가만있자, 나 글 써야 하는데...' 중얼중얼 하면서 다시 책상에 가서 앉았더니 손이 거칠거칠하다.
잠시 핸드크림을 가지러 다른 방에 갔더니 의자 위에 잔뜩 쌓여있는, 미처 개지 않은 빨래들이 보인다. 바닥에 앉아서 산더미 같은 빨래를 개어 아이 방 서랍장 속에 넣고 문득 책상을 보니, 컴퓨터의 화면이 저 혼자 꺼져버렸다.
"어머 나 글 쓰려고 책상에 앉았었는데,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면서 깜짝 놀랐다.
요즘 들어 매사에 이런 일이 잦다. 해야 할 일을 제시간에 끝내지 못하고, 이것저것 하다가 게으름 때문에 해내지 못하는 경우 말이다.
건강 때문에 운동을 꼭 해야 한다. 일주일에 한 번 레슨 받는 악기도 연습을 꼭 해야 실력이 는다. 독서토론 모임용 책도 읽어야 하고, 이 주일에 한 번씩 그룹 기사도 써야 한다. 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많은데, 결심한 일들을 잘 하지 못한다. 특히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사용하다 보면 더 심각하게 길을 잃곤 한다.
글을 쓰다가 카카오톡으로 받은 자료를 찾으려고 잠시 카톡을 켰는데 정신을 차리니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다가 또 불현듯 '가만있자, 내가 뭘 하려고 인터넷을 켰더라?', 원래 목적을 잊고 자꾸 깜빡깜빡 하는 일은 뭐 말할 필요도 없다.
운동 동영상을 찾으려고 유튜브 찾다가, 운동은 시작도 못하고 관련 없는 동영상만 보다가 결국 운동을 하지 못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꼭 끝내야 하는 일들도 제시간에 못한다. 운동도 2주에 한 번 있는 기사 마감도 모든 일이 그렇다. 이렇게 밀려버리면 "아~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그냥 하지 말고 포기해 버릴까?" 하는 '현타'가 온다.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다른 일에 시간과 정신을 빼앗겨 정말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만 같다. 해야 할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주변에 쉽게 산만해지거나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나. 이거 혹시 병은 아닐까?
드라마에서 배운 내 능력의 비밀
얼마 전에 보기 시작한 드라마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이라는 드라마에는 초능력이 있지만 현대인의 질병으로 인해 그 능력을 펼치지 못하는 인물들이 나온다(아래 내용은 '스포일러 주의').
엄마인 복만흠 여사의 능력은 예지몽인데 불면증 환자이다. 전에는 예지몽을 통해서 미리 주식도 볼 수 있어서 갑부가 되었는데 통 잠을 못 자는 통에 괴롭다. 아들 복귀주는 과거로 회기 하는 능력이 있다. 무척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울증에 걸려버려서 더 이상 행복하지가 않다.
그 집 딸 복동희는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한때는 슈퍼모델로 활동했으나 이제는 고도비만이다. 그래서 더 이상 하늘을 날지 못한다. 손녀딸 중학생 복이나는 스마트폰 중독과 고도근시로 유전인 초능력이 발현되지 않는 듯 보여서 할머니에게 의심을 받는 중이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내 능력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사실은 나도 초능력까지는 아니어도 결심한 일을 다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도 몰라. 집중력만 꽉 붙잡으면" 하고 말이다.
사실 우리 모두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살 빼는 거 사실 어렵지 않다, 먹는 것보다 더 많이 움직이면 된다. 기사 쓰는 일도 그렇다. 책상에 앉아서 또각또각 글을 쓰면 어느 순간 끝난다. 이 정도는 초능력이 없어도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정답을 알면서도 잘하지 못하는 나는 무엇이 문제일까?
그때부터 나는 조금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어차피 내 의지로는 안 되는 일이니 강제로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드는 방법밖엔 없다.
방법을 바꾸었더니 길이 살짝 보인다
하기로 했고 꼭 해야 하는데 미루고 있는 일 중 가장 중요한 기사 쓰기를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곧장 가서 책상으로 직행해서 의자에 앉아서 끝마치기로 했다. 그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함께 기사를 쓰는 시민기자 동료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기자님들~~안녕하시옵니까. 제가 만약 오늘까지 기사를 못 보내면, 여러분께 커피를 쏘겠습니다."
혼자서는 안 되니, 여기에 경제적 압박까지 더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 나 스스로 머릿속으로 '이걸 하지 않으면 손해다'라는 생각과 마음의 짐을 늘려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을 스스로에게 주는 것이다.
확실히 이 방법은 효험이 있었다. 이제부터는 꼭 해야 하지만 자꾸만 미루는 일에 스스로를 묶는 압박을 가해볼 생각이다.
또 하나의 방법, '집중하는 시간만큼은 핸드폰 보기 싫게 만들기'다. 내가 집중하는 일을 할 때는 핸드폰을 '집중모드'로 바꿔놓고 들여다보지 않는다.
특히 흑백 모드로 변환시켜 놓으면 핸드폰 볼 맛이 뚝 떨어진다. 게임을 하고 싶어도 색깔 구분이 안되어서 진행이 되지 않을 지경이다.
금방 해제할 수도 있지만, 뭔가에 집중하다가 혹시나 핸드폰을 들었을 때, 색깔이 흑백이면 조금은 마음의 찔림이 생긴다.
이렇게 조금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놓는다. 그러면 히어로만큼이나 초능력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스스로의 생산성이 좀 더 늘고 개인적으로 하는 일들도 뭔가 좀 결실을 맺지 않을까?
나이가 들면서 재미있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자꾸 줄어들 것만 같았는데, 그렇지 않다. 해 보고 싶은 일과 잘 해내고 싶은 일들은 자꾸만 생긴다. 다만 잘 해내고 싶지만, 젊을 때처럼 빠른 시간 동안 숙달되지 않는다.
금세 지치고 늘어지고 귀찮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도 이렇게 늘어지는 나를 조금 더 추슬러보기로 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계속해서 더 건강하고 재미있고 생산적인 인간으로 나이 들고 싶으니까.
내가 비록, 히어로는 아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