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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어린이집 등원을 시키고 엄마들은 하나, 둘 커피를 마시러 모인다. 수다의 주제는 다양하다. 시댁 욕, 남편 욕, 어린이집 욕 아니면 연예인 욕이나 정치인 욕까지 세상에 온갖 욕을 다 맛보는 욕 맛집에서 욕쟁이가 되어 '맛점'을 하고 나면 이제 슬슬 하원을 시킬 시간이 다가온다.

하원을 시키고 놀이터에서 다시 삼삼오오 모인다. 돗자리를 펴고, 아이들을 위해 챙겨왔지만, 엄마들이 더 많이 먹을 간식과 음료를 꺼낸다. 아이들은 놀이터로 뛰어간다. 곧 돗자리 위에서 엄마들의 수다 2차전이 시작된다. 이 모임의 아이들은 목적인 동시에 수단이 된다.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싸우거나 다치면 모임은 자동으로 조기 종료가 될 수 있다.

점점 어슴푸레한 해 질 녘의 냄새가 놀이터에 피어오르면 귀가 시간이 다가옴을 느낀다. "오늘 아이 아빠 출장인데, 우리 집에서 애들 짜장면 시켜주고, 우린 맥주 한 잔할까?" 누군가 운을 띄우면, 그 말이 땅에라도 떨어질까. 덥석 받아서 3차 장소로 이동한다. 맥주 한 잔이 들어가면 더 솔직하고 찰진 욕이 시작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9 TO 6 근무도 모자라 연장 근무가 시작된다. 술이 떨어지고, 체력이 떨어지면, 곤한 몸과 지친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향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풀타임욕잡러'의 하루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살림을 대충 정리하고 아이를 씻기고 재우는데 쓸 체력은 이미 바닥이다. 빨리 움직여주지 않는 아이에게 남은 에너지를 쥐어짜서 짜증스럽게 대응한다. 아이들을 재운 뒤 드라마를 보며 '남주'의 스윗한 멘트로 지친 심신을 달래본다. 드라마는 내일 모임의 주제가 될 수 있으니 반드시 필수로 시청해야 한다.

남편 직장 때문에 연고 없는 곳으로 이사를 와 아이를 낳았다. 남편은 늘 일로 바빴기 때문에 '다같이육아'가 절실히 필요했다. 초보 엄마에게 '다같이육아'는 육아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육아용품을 나눠 쓰고, 육아의 어려움을 나누며 산후우울증도 이겨낼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다같이도 나홀로도 아닌 나답게 육아합니다.
▲ 나답게육아 다같이도 나홀로도 아닌 나답게 육아합니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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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삶의 패턴이 계속 반복되자 '다같이육아'라는 허울 좋은 명목만 남고, 정신과 육체는 점점 소진되었다. 육아하는 것도 아니고, 살림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닌 그저 무리지어 덩어리가 된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목적 없이 길을 잃어버린 모임은 모임을 위한 모임이 되고, 말을 위한 말들이 넘쳐났다. 오로지 시간은 소모될 뿐.

놀다 보면 늘어지고, 늘어지다 보면 엿가락처럼 붙어버려 떼어내기 힘들다. 이미 놀이터 멤버로 맺어진 관계는 아이들도 엄마들도 마약처럼 중독되어 끊기 힘들다. 장소만 바뀌며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 무서운 패턴을 끊기 위해선 이사를 하거나, 워킹맘이 되거나, 둘 중 하나.

이사나 취업이 아니고서는 이 무리에서 함부로 빠질 수는 없다. 육아의 어려움을 공유하고, 같이 공감하며 '다같이육아'를 해 온 이들은 힘든 시기를 같이 보낸 전우애 같은 것이 생겨, 누구 한 명이 이 모임에서 빠지는 것을 탈영쯤으로 여기고 매우 경계하기 때문이다. 배신자의 꼬리표를 달고 혼자 육아 하기로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그 힘든 결정을 하고 혼자 육아하기로 했다. 놀이터를 나가면 이제 또래 엄마를 봐도, 적당히 웃으며 목례만 할 뿐, 더 이상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아이들끼리 친구라고 해서 엄마들끼리 친구여야 하는 법은 없으니까. 아이들의 인간관계와 나의 인간관계를 분리하고 나니 삶이 훨씬 심플해졌다.

친구와 더 놀고 싶다는 아이에게 "이제 가야 할 시간이야"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집으로 돌아와 남은 에너지로 아이와 한 번이라도 더 눈을 마주치고, 따뜻한 목욕물을 받아 여유롭게 씻기고, 오늘 지낸 이야기를 하며 저녁 식사를 한다. 자기 전엔 동화책 한 권 읽어줄 수 있는 짬이 생겼다.

'나홀로육아'는, MBTI '파워I'이며 하루에 쓸 에너지 총량이 날 때부터 적은 나에게는 참 잘 맞았다. 오로지 우리 아이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고, 아이의 결핍과 요구를 잘 살필 수 있었다. 아이들이 모여 있을 땐 정신없고 복작거려 큰 소리로만 의사를 전달했는데 이제는 아이와 조용히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다.

'아이가 사회성이 떨어지면 어쩌지?', '내 아이만 혼자 놀면 어쩌지?' 그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온종일 아이들과 섞여 있을 때는 친구들과 노는 시간의 소중함을 몰랐던 아이도 어린이집에서 더 집중해서 친구들과 신나고 재밌게 놀고 왔다. 가끔 더 놀고 싶어 할 때도 있지만, 아이도 이제 안다. 하원 후에는 가족들과 편히 쉬는 시간이라는 걸.

나도 소모되는 시간 없이, 하루가 알차게 지나간다. '다같이육아'의 정신없이 몰아치는 시간 뒤에 헛헛함은 사라지고, '나홀로육아'의 고요함 가운데 다정함이 샘솟는다. 함께였던 시간은 양적으로 홍수처럼 마구 쏟아졌지만 흐리멍덩했다. 이제 나는 혼자이지만, 엑기스만을 담아 질 좋은 고농도 찐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같이 육아', '나홀로 육아' 둘 다 분명히 가치가 있다. 육아의 방법론적인 면에선 무엇이 옳고 그름이 없다. 육아에는 정답이 없다. 그래서 나는 '다같이'도 '나홀로'도 아닌 '나답게 육아' 하기로 결심한다.

태그:#육아, #에세이, #양육, #워킹맘, #전업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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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해진 인생에 글쓰기는 긴장감을 준다. 오래 쓰지 않아 낡은 악기를 조율하듯, 흘러간 세월 속에서 파손된 부분을 확인하고, 결함이 있는 부분을 수리한다. 음높이를 맞추고, 소리를 점검한다. 어쩌면 ‘나도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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