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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보험 없는 주부들이 쓰는 '점을 찍는 여자들'은 끊임없는 시도를 통해 그 무엇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시민기자들의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전 구글 매니저가 한 강연에서 성공하는 스타트업 대표의 조건으로 '한 발자국 더 나가는 오지랖'을 말했다. '이 단계에서 굳이 이것까지 해야 할까?' 일 때 굳이 '이것'까지 하는 오지랖, 그게 기회를 만든다고 했다. 

내가 스타트업 대표씩이나 되진 않지만 이 말이 기억에 남았다. '나서서 했다가는 괜히 내 일거리만 만든다'를 흔히 듣던 터라 정확하게 반대 지점에 있는 이 말이 신선했을지도 모르겠다. 

작년 겨울, 어린이 교재 만드는 팀에 음원 제작 및 작가로 들어갔다. 나보다 최소 열 다섯 살은 많은 사람들과 하는 첫 미팅에서 나는 굳이 음원과 원고 몇 개를 만들어갔다. 음원에 대해, 원고 톤에 대해 설명하느니 그냥 들려주고 보여주는 게 더 빠르다고 생각해서다. 덕분에 내가 생각했던 음원과 원고 방향은 확실하게 어필했다. 구글 전 매니저의 강의가 실전에서는 이렇게 작용하는구나 했다. 

강의는 그저 강의였을 뿐일까. 일이 중단됐다. 내게 처음 일을 제안했던 대표님은 음원과 원고 아까워서 어쩌냐며 미안해 했지만 덕분에 대표님이랑 잘 놀았으니 괜찮다고 했다. 인사치레 아니고 진짜 그랬다. 

반년이 지났다. 그때 같은 팀이었던 한 분이 내 음원과 원고를 다른 프로젝트에 제안했더니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했다. 지난번에는 교재제작, 이번에는 영상제작이었다. 주최 측은 정식 미팅을 잡고 25분짜리 영상 스크립트 샘플을 요구했다. 

우리 팀에서 카메라 앞에 설 분을 섭외했다. 그 분은 스크립트가 필요없다고 했지만 나랑 대표님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각 챕터마다 예상 시간을 넣은 스크립트를 만들었다. 오지랖인가 싶었지만 그게 처음 일을 만드는 사람의 자세라고 구글 매니저가 그랬으니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미팅 전 날, 대표님께 원고를 보냈다. 이렇게 일하는 사람이 좋다는 답이 왔다. 쓸데없는 짓을 하진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도 잠시, 주최 측 내부 사정으로 모든 프로젝트가 임시 중단된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건 우리 준비 사항과 상관없는 불가항력 일이었다.
 
하루 전에 이렇게 엎어질 수도 있구나
▲ 일이 틀어졌다 하루 전에 이렇게 엎어질 수도 있구나
ⓒ 최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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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아무 죄 없는 구글 전 매니저에게 짜증이 났다. '이봐요, 당신 말대로 한 걸음 더, 오지랖 넓게 이것저것 다 했는데 뭐 하나 되는 게 없잖아요!'라고 따지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소파에 누워 페이스북을 휙휙 넘겼다.

그러다 내게 제안 주셨던 대표님네 고양이 소식을 봤다. 임시보호를 맡았다가 정이 들어 그대로 가족이 됐던 고양이다. 반려동물을 처음 맞았다는 대표님은 고양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에서 사랑이 뚝뚝 떨어졌다. 그랬던 아이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는 소식이다. 

날짜를 보니 이번 일을 한참 준비할 때다. 공과 사를 구분하는 건 일하는 사람의 당연한 자세라지만 터져나오는 슬픔을 다른 사람 모르게 수습하는 건 당연함을 넘은 일 같았다. 더군다나 회의 끝나고는 나랑 농담 따먹기도 했는데 말이다. 

일을 하다보면 외부 요인으로 엎어질 수도, 일과 상관없는 슬픔이 몰아닥칠 수도, 그밖에 내가 상상하지 못한 다른 경우의 수도 생긴다. 그 모든 과정이 일이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 있다.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라면 그 하위 카테고리인 일 역시 계획에서 어긋나는 게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싶었다. 고양이 무지개 다리가 미련한 나를 일깨운다. 일을 하고 싶어 했으면서 내 입맛에 맞게 진행되는 일만 그리고 있었다는 게 부끄러워졌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를 새로 공부해서 25분씩이나 스크립트를 쓰는 연습을 했고, 손 놓고 있던 음원 제작을 했다. 이 음원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먹히는지 테스트도 해봤다. 오지랖이 아니었으면 얻지 못했을 일들이다. 

오지랖이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켜 다른 일을 만들지 아직 모르겠다. 행여 아무 일을 만들지 못하더라도 이젠 괜찮다. 일을 제안해 준 대표님과 결을 맞추고 신뢰를 얻었으니 차후 일을 도모할 선배 동지를 얻은 셈도 된다. 그러니 구글 전 매니저가 추천한 오지랖이 다 무슨 소용이냐며 침잠하지 않기로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SNS에도 실립니다.


끊임없는 시도를 통해 그 무엇이 될 수 있다고 믿는, 4대보험 없는 여성 시민기자들의 이야기입니다.
태그:#점을찍는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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