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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갖는 여유다. 민도로섬 화이트 비치의 하얀 모래가 햇빛에 은빛으로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일년내내 지칠 줄 모르고 쩌렁쩌렁하던 햇빛과 습한 날씨가 나를 몹시도 지치게 했었는데, 오늘은 그렇게 싫지만은 않다. 남중국해의 잔잔한 물결이 호수처럼 푸르다. 멀리서 느리게 지나가는 함선이 꿈처럼 아련하다.

1년 동안의 해외 살이가 영상처럼 잔물결에 일렁이며 지나간다. 지난해, 기대와 우려로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기억이 생생한데 어느덧 돌아갈 시기가 되었다(관련 기사: 퇴직 후 해외에서 살아보기, 이렇게 이뤘습니다 https://omn.kr/25ecz ). 그 끝자락에서 며칠간의 휴가를 얻어 이렇게 호사로운 시간을 갖는다.

1년 전 필리핀 민다나오섬 최남단의 도시 다바오에 KOICA 해외봉사단의 일원으로 그곳 직업훈련센터에 도착했을 때 나를 맞아 주던 직원과 학생들의 따뜻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들 모두가 수줍음이 많고 다정다감했던 사람들이다. 그들과 함께 부대끼고 뒹굴며 같이 지식과 문화를 나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함께 한 의미있는 시간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학교 실습농장에서 가꾸는 토마토
학교 실습농장에서 가꾸는 토마토 ⓒ 임경욱
   
처음 도착했을 때는 음식이 맞지 않아 구내식당에서 해주는 점심을 먹을 수가 없었다. 푸석한 밥 한 공기에 한두 가지의 반찬으로 이뤄진 식사는 못 넘길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달게 먹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배가 고프다 보니 적응이 되어 맛있게 먹을 수 있었지만, 영양을 보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초라한 식사였다.

해외 살이에서 먹거리만 해결되면 만사가 형통한다. 그래도 다행히 점심은 학교에서 해결하고, 아침은 과일로 때웠다. 저녁이 문제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요령이 생겨 재래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채소와 참치통조림 등이 좋은 찌갯거리가 돼 주었다.

이곳에 와서 살이 좀 빠져 몸무게가 가벼워졌다. 내가 늘 갈망하던 무게 이하로 내려가니 몸도 가볍고, 활동하는데 훨씬 날렵하고 편하다. 건강을 지키면서 몸무게를 줄이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런데 난 해외살이 덕분에 그걸 성취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얻어가는 셈이다.

조금이라도 알찬 수업을 위해 시간을 쪼개 프레젠테이션으로 자료를 만들고, 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영어와 세부아노어를 함께 적어서 강의안을 작성했다. 어려운 내용일지라도 사진과 영상을 활용해 전달하면 학생들이 훨씬 쉽게 이해한다. 실습으로 학생들과 만들었던 친환경 미생물제제와 유기 퇴비는 발효와 숙성과정을 거치고 있다.

한국에서 종자를 가져와 학교 실습농장에 파종한 고추, 상추, 토마토, 가지 등은 수확기에 접어든 것도 있고 어린 모종인 것도 있다. 이들은 충분히 발효된 친환경 미생물제제와 유기 퇴비를 양분 삼아 자랄 것이다. 그걸 함께 심었던 학생들도 학기를 마치고 상급 학년으로 올라가 새로운 진로를 모색할 것이다.
 
 한국문화축제에 선보인 족구대회
한국문화축제에 선보인 족구대회 ⓒ 임경욱
    
학생들과 교직원이 함께했던 체육대회, 세미나, 워크숍과 한국문화축제는 참여한 모든 사람이 꿈과 희망을 나눠 가지는 의미 있는 행사였다. 그런 행사를 통해 개인은 물론 조직의 발전을 위해 지식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다. 나도 그런 행사를 통해 그들과 더불어 정을 나누고 한국 문화를 소개함으로써 서로를 알아갈 좋은 기회가 되었다.

처음 해외 봉사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이 고민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주는 것도 좋겠지만 내 능력과 재정적인 상황 등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도 없다. 그들이 봉사자에게 거는 기대치가 있기에 그에 맞춰서 활동해줘야 한다.

그러나 그 기대치라는 것이, 하자고 하면 한이 없다. 학생들에게 선진지식을 전달해 주는 것은 기본이다. 그들은 실습장을 설치해 주고, 실습에 쓰이는 장비를 지원해 주길 원했다. 농기구와 농기자재, 학생들이 작업할 때 착용할 수 있는 작업복, 작업화, 작업모 등은 내 능력의 범위 내에서 해결할 수 있었으나, 실습장은 내 능력 밖이라 설치해 주기 어려웠다.

필리핀에 함께 파견된 동료 단원 아홉 명 중 두 명은 본인이 이루고자 했던 목표와 파견기관에서 필요로 했던 요구사항들이 맞지 않는 탓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중도에 귀국했다. 서로의 꿈과 요구가 합치되지 못한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서로가 원하는 것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것도 봉사단원들이 해야 할 소양이다.
  
 산책길에서 만난 송아지 가족
산책길에서 만난 송아지 가족 ⓒ 임경욱
 
원하는 걸 다 해주지 못한 아쉬움도 있지만, 한편으론 그들이 자주적으로 그것들을 구축했으면 하는 마음도 생겼다. 필리핀은 6·25전쟁 전에는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였다. 우리나라에 경제적으로 원조도 해주고 6·25전쟁 당시에는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많은 병력도 파병해 준 나라다. 그런 그들이 왜 지금은 이렇게 사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그들 스스로 자문하지 않고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해외 봉사자들의 마음은 모두 한결같을 것이다. 내가 봉사자로 잠시나마 몸담았던 그곳이 지금보다는 더 건강하고 풍요롭기를 원하는 마음 말이다. 지구인들이 전쟁과 자국의 이익에만 매몰되지 않고 평화를 위해 조금만 더 나눔과 베풂을 실천한다면, 모두의 삶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평온하고 따뜻해질 것이다.

주말과 휴일의 해거름이면 운동 삼아 걸었던 그 동네의 골목길과 구릉지 초원이 벌써 그립다. 올망졸망 아이들이 뛰어놀던 동네 골목을 걷노라면 맹랑한 아이들이 다가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말을 걸곤 했다.

구릉의 초원에서 풀을 뜯던 소들은 내가 다가가도 못 본 채 늘 무심했다. 그곳 동물들도 날씨와 환경에 적응해 움직임이 느리고 새로운 것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들은 나 없이도 예전처럼 잘 살 것이라는 걸 알기에 마음이 편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임경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자작나무숲’(https://iku1209.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코이카봉사단#KOICA#한필직업훈련센터#TESDA#필리핀다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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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 essayist, reader, 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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