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젬병, 형편없는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 자기 자신에게 젬병이라는 말을 써야 할 때, 그 마음이 멀쩡한 사람이 있을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이라면,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런데도 부득이 젬병이라는 말로 누군가를 이해시키고 싶을 때가 있다. 겸손이 아니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나 자신이 좀 별로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젬병이라고 말해 두는 게 상대방의 이해를 얻는 데 효과적일 때가 있다.

'제가 요리에 젬병이라서요'

다 같이 음식 한 가지씩 해가야 하는 때라든지, 집에 손님이 들이닥쳤을 때 같은 경우 말이다. 그럴 때 나는 양해를 구한다. '제가 요리에 젬병이라서요. 배달 음식을 주문해도 괜찮을까요?' 그럴 때 대다수는 마음을 더 넓히고 고맙게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준다.

나의 경우 젬병인 영역이 여러 가지가 있다. 운전이든 도보든 '낯선 길을 찾아가는 일'에 젬병이기도 하고, 딸아이를 키우면서도 '머리를 예쁘게 묶는 일'에 젬병이기도 하다. '패셔너블하게 옷을 차려입는 일'에도 젬병이고, 그래서 남편과 아이들 '옷을 멋지게 코디하는 일'에도 젬병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도 더욱 자괴감이 두드러지는 영역은 역시나 요리다.
 
요리는 내 몫이다(자료사진).
 요리는 내 몫이다(자료사진).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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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없어하는 영역이 많으면 삶의 질은 좀 떨어지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자신감이 줄어들다 보니 우울감을 경험할 때가 있다. 요리 젬병으로서의 이러한 우울감은 20년 차 전업주부에게 거는 당연한 듯한 기대치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강할수록 더 심해지는 듯하다.

"시집가면 다 잘하게 돼. 벌써부터 연습할 필요 없어."

결혼하기 전에 했던 친정엄마의 말씀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 되었다. 언니는 정말로 잘하게 됐고, 나는 여전히 젬병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많이 하는 질문. 

"결혼 20년 차면 웬만한 음식 다 잘할 수 있게 되지 않나요?"

울컥하지만, 그렇게 묻는 사람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이 시간이 지날수록 요리를 잘하게 된다. 그리고 나 역시 그렇게 믿는 사람 중에 속해 있었다. 그 믿음을 흔들어 놓은 장본인이 바로 나라는 사실이 씁쓸할 뿐이다.

"요즘은 레시피가 워낙 잘 나와 있어서 그냥 따라만 하면 되지 않나요?"

두 번째로 많은 질문은 이것일 테다. 하지만 나와 같이 젬병인 사람을 위해 설명은 해두고 싶다. 내비게이션이라는 훌륭한 안내도구가 있어도 '경로를 이탈'할 때가 있듯이, 레시피라는 친절한 안내가 있어도 '음식을 먹을 수 없는' 때가 있다는 것을.   가능하면 요리를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앞으로도 나는 계속 요리해야 할 것이다. 음식 하나를 맛깔나게 완성하는 일에 젬병인 나는 전업주부이기 때문이다. 세 아이를 양육하는 엄마이기 때문이다. 월수입이 비정상적으로 늘지 않는 한, 요리 도우미를 고용할 일은 없을 것이다. 빼도 박도 못하게 가족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내 손에서 마련된다는 얘기다.

이제 나에게 필요한 것은 20년 차 주부에게 거는 기대치와 사회적 통념에 대한 부담감을 떨치는 일인 것 같다. 20년 차 주부도 요리를 못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눅 들지 말아야겠다. 게을렀거나 무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잘하는 영역이 조금 다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줘야겠다.

내 주방의 주인은 나니까

"엄마, 나는 엄마가 해주는 김치볶음밥이 제일 맛있어."

그래도, 젬병이어도 가끔 성공할 때가 있다. 물론 재료가 훌륭해서 도저히 맛이 없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때 게 눈 감추듯 음식을 먹어 치웠던 세 아이의 행복한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아이들의 웃는 얼굴이 뇌리에 남아 있는 한, 나는 자꾸 가라앉는 마음을 꼭 붙들고 요리를 하고야 말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내 주방의 주인은 나다. 성공과 실패가 오가는 요리의 현장에서 성공을 만끽하는 것도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도 다름 아닌 나인 것이다. 결혼하면 당연히 잘해야 하는 것, 20년 차 주부라면 웬만큼 잘해야 하는 것, 레시피가 있으니 못하면 안 되는 것. 그와 같은 기대치와 사회적 통념은 이제 안녕.

젬병. 이건 더 이상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말이 아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가스 불을 켤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말이다.

나의 형편없음을 드러내는 말이 아닌, 그럼에도 '노력하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말이다. 또한 요리에 재능 있는 누군가를 기꺼이 칭찬하고 존경할 수 있는 '마음이 넉넉한 사람'임을 드러내는 말이다.

한참 길을 헤매다 '목적지 부근에 도달하였습니다'라는 말에 안심하게 되듯, 주방에서 고군분투하다 '오늘 밥 너무 맛있었어'라는 말에 행복할 수 있기를. 그런 마음으로 나는 오늘도 씩씩하게 쌀을 씻는다.

태그:#요리에젬병, #기대치와사회적통념, #부담을떨치다, #씩씩함장착, #오늘도쌀을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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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평범한 주부. 7권의 웹소설 e북 출간 경력 있음. 현재 '쓰고뱉다'라는 글쓰기 공동체에서 '쓰니신나'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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