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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전에 찍은 개화파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서광범, 세 번째가 민영익이다. 네 번째 어린이는 박용화다.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홍영식이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유길준이다. 한 자리에 모여 사진을 찍었지만 급진 개화파는 갑신정변을 통해 민영익을 비롯한 민씨 정권에 칼끝을 겨눴다.
▲ 갑신정변 전에 찍은 개화파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서광범, 세 번째가 민영익이다. 네 번째 어린이는 박용화다.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홍영식이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유길준이다. 한 자리에 모여 사진을 찍었지만 급진 개화파는 갑신정변을 통해 민영익을 비롯한 민씨 정권에 칼끝을 겨눴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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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논쟁다운 논쟁이 없었다. 반대·주장·비난·억지·유체이탈 발언이 판친다. 예외가 있다면, "충신도 역신도 없었던 호국논쟁", "결지자(結紙者)도 충이요 열지자(裂紙者)도 충이다"는 평이 따르는 남한산성의 호국논쟁이다.

인조의 항서에 반대하는 척화론과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청국과의 화평을 주장했던 주화론이, 국가의 명운이 걸린 남한산성에서, 척화론자와 주화론자는 밤을 세워 논쟁을 벌였다.    

경우는 다르지만, 그로부터 260여 년이 지나, 고종이 단발령을 내렸을 때에 면암과 내무대신 유길준과의 논쟁이 있었다.

앞장에서 언급한 대로 유길준은 단발령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이를 비판한 면암을 투옥하고 나라의 개화를 위해 단발을 솔선해 달라고 서찰을 보냈다. 이에 면암은 옥중에서 당당하게 반대주장을 폈다. 오늘의 시점에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고, 개화파와 보수파를 대변하는 두 사람의 논쟁을 통해 당시의 흐름(사론)과 두 진영의 입장을 살펴본다.

면암선생께

……부모의 병환이 위독하면 손가락을 끊고 다리를 잘라 부모의 명(命)을 구제하는 것이 효자의 떳떳한 도리라면 이제 나라가 병들어 시든 것을 구하려 하는 마당에 어찌 한줌의 머리털을 그리도 아끼십니까?

선생은 대신의 몸으로서 마땅히 향중(鄕中)의 청소년들을 모아 놓고 국왕으로부터 머리 깎으라는 조칙이 내렸음을 알리신 다음 선생부터 먼저 머리를 깎고 솔선수범하시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도, 무리를 이끌고 성묘(聖廟)에 나아가 통곡을 하시다니, 가령 공자께서 오늘에 계신다하더라도 머리를 깎으실 일이어늘 선생께서는 장차 이 일을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이는 선생께서 지하에 가 계신다 해도 부모의 혼령이 나무라실 일이요, 또 만일에 남의 나라에 가신다 해도 오늘날 세계의 만국이 모두 머리를 깎고 있으며 저 청나라 사람들마저도 따아내렸던 긴 머리를 돌려 깎아버려, 머리를 깎지 않은 선생께서 오히려 부끄럽게 되실 터이니 선생은 이를 알아 빨리 회답해 주소서.  

유길준의 이러한 서찰을 받은 최익현은 즉각 붓을 들었다. 긴 글이지만 사료적 가치가 있는 내용이기에 한번쯤 읽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유길준은 괴변을 농하지 말라

익현은 이곳 경사(京師:서울)에 붙들려 온 후 혼미로 그 죄를 살피지 못하고 오직 조가(朝家:조정)의 처분만 기다리던 중 이에 성상(聖上)의 전지(傳旨)나 법사(法司)의 고치(拷治:유길준을 가리킴)의 사사로운 수서(手書)만이 내려와 처음에는 달래고 끝에 가 꾸짖으며 마치 아끼어 애석해 주는 듯하고 있으니 이 어찌된 일인가?

그 허실도 살피지 않은 채 풍문만 듣고 선뜻 잡아다 죄상을 따지지도 않고 다만 의론에만 맡긴다는 것은 이 모두가 권세를 잡은 사람들이 입법 시행하는 체모가 아니라고 이 늙은 사람은 생각한다. 

그러나 보내 준 글을 받아보니 그 종횡으로 농락하여 백출하는 변괴가 보는 이의 가슴을 떨리게 하여 감히 옳게 바라볼 수도 없게 하니, 그 대치(大致:개요)는 한마디로 오늘의 사세로 경장개혁(更張改革:갑오개혁)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며, 다음은 성상께서 스스로 먼저 단발하셨으니 신하도 마땅히 그 군명을 따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집사(執事)가 어깨를 뽐내며 큰소리로 온 나라를 억압해 온 내용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이 늙은이가 우루(愚陋)로 방황하며 누차 그 미혹(迷惑)을 깨보려 노력하였으나 종내 그것을 이루지 못한 바로 그 내용이고 보니 여기서 불가불 한번 담판(談判)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무릇 법이 오래되면 폐가 생기고 폐가 생기면 그것을 교정해야 한다 함은 유국(有國)의 상사이며 시세에 따라 의당 그러해야 할 이치로 보아 없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국가성법(成法)이 아무리 두루 아름답다 해도 그에 대한 경장변통의 논의는 이미 중세의 선현들로부터 내려온 바 있다.

그러니 하물며 이 말세에 당하여 백성들이 병들고 나만을 없애려 할 때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우리나라는 유사 이래로 이속(夷俗:야만인의 풍속)을 변화시켜 문화를 이루어왔으니,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는 군군·신신·부부·자자(尹尹·臣臣·父父·子子) 그 인의의 교(敎)와 예악의 속(俗)은 빛나고 빛나 중국의 3대에 결코 못하지 아니하였다. ……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무슨 천화(天禍)로 왜·양의 무리들이 우내(宇內)에 그 기세를 떨치고 파렴치하게 비굴하는 무리들만이 조정에 가득 차서 적의 꼭두각시가 되어 거리낌 없이 그 흉악을 떨치고 있으니, 위로는 우리 임금을 속이어 가려 버리고 아래로는 충언(忠言)을 막아 버려 숨막히게 하였다.

그러한 잘못은 점점 쌓이고 커져 드디어 금년 8월과 11월 14일의 변(變)마저(명성황후 살해 사건과 단발령) 터지게 되었다. 이에 이 겨레 모든 신민들은 모두 난적의 죄인이 되었고 이 나라 천지에는 다시 회복될 수 있는 모든 기미가 사라져 버렸으니 아 슬프다. 이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중략)

이 늙은이도 성품도 소우하고 학식도 멸렬하여 구습에만 안주하여 늙은 우매함이 이를 데 없어 이 세상에는 있으나마나한 사람이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배워 온 것은 오직 선왕의 말이며, 입어 온 것은 오직 선왕의 옷이며, 조석으로 닦아 온 것은 오직 선왕의 덕행이었다. 그러니 비록 앞에서 더 없는 곤욕이 밀려오고 뒤에서 무서운 죽음이 따라온다 한들 그것이 어찌 이 뜻이 만분의 일인들 움직일 수 있겠는가?

이제 집사는 동에 강한 적을 업고 세권(世權)을 주장하여, 그 위엄으로 세상에 꺾지 못할 것이 없은 즉, 무엇 때문에 이 늙은이를 하루빨리 단죄하여 세상에 죽여보임으로써 천하로 하여금 수도수정(守道守正)을 해선 아니되고 국모를 척살하고 임금의 머리를 깎게 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도리임을 알리려 하지는 않고서, 구구하게 늙은이가 머리를 깎지 않고 성묘에 통곡한 몇 가지 일들을 가지고 이것저것 글로 논쟁함으로써 스스로 그 높은 권위만 손상시키고 있느냐? 

이 늙은이는 불행하게도 늙어서 죽지를 못하고 이런 때를 당하였으니 그 의리로 보아서는 오늘의 역적배들과 결코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다. 그러나 내 이미 능히 그 역적들을 죽여 없애지 못하였은 즉 나는 마땅히 그 역적들의 손에 죽는 것이 이치에 당연하다. 그러기에 입 다물고 다만 죽이는 명령만을 기다렸더니 보내 온 글에서 회답 독촉하는 소리가 높아 가슴 안 뜻의 만 분의 일을 대략 펴서 초초(草草)히 이렇게 회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장개혁의 득실 여부에 대하여는 여기서 논할 필요조차 없어 말하지 않았으니 양찰 있기를 바란다. (주석 1)


주석
1> 김삼웅, <왜곡과 진실의 역사>, 230~235쪽, 동방미디어, 1999.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최익현평전#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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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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