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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기 I '별길(Starlink) B, Urethane coating on stainless steel 50×35×35cm 2021 재치가 넘치는 작가는 '별길'을 이렇게 기하학적 요소가 풍부한 오브제 아트로 재구성하다.
 이슬기 I '별길(Starlink) B, Urethane coating on stainless steel 50×35×35cm 2021 재치가 넘치는 작가는 '별길'을 이렇게 기하학적 요소가 풍부한 오브제 아트로 재구성하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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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갤러리현대에서 2018년 '다마스스(DAMASESE)' 이후 이슬기(1962년 생) 작가는, 6년 만에 2번째 전시를 열었다. 그녀의 단순해 보이는 설치작품은 고정된 의미를 벗어난 참신한 재치를 발휘한다. 살펴보면 작품 설치는 엉뚱하다. 구멍 난 물건이나 이불도 전시장에 걸면 작품이 된다.

그녀는 2018년 갤러리현대 전시도 그랬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누워서 떡 먹기', '수박 겉핥기', '오리발 내밀기' 같은 속담을 설치 미술로 치환해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가 되었다. 작가는 그 속에 담긴 은유를 시각으로 풀었다. 익살과 해학 넘치는 그녀의 이런 제작물을 보고 있으면 삼삼한 맛이 난다. 이번 전시 제목도 '삼삼'전이다.

인류학적 미술가
 
 작업을 설명하는 '이슬기' 작가
 작업을 설명하는 '이슬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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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는 부모가 동양화·서양화 전공자였단다. 선화예고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국립미술대학(DNSAP)'에 유학했다. 그의 스승은 그녀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넌 한국을 잘 알아야 해!"

그래서인가 한국적 주제가 많다. 20세기 최고의 인류학자하면 프랑스의 'C. 레비-스트로스'가 있다. 그런 프랑스 학풍의 영향인가, 선사시대부터 시대를 통째로 응시하며 인류학적 관점을 보인다.

디자인 감각도 빼어난 이 설치미술가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전통과 문화를 소환한다. 일상과 관련된 사물, 언어, 자연에 관한 관심이 높다. 또 여러 나라 장인들과 협업을 즐긴다. 멕시코의 전통 바구니 장인과 함께 일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통영의 누비이불 장인들과 협업했다. 한국 단청과 문살도 그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다.

그녀는 하찮은 물건에 여러 나라의 민속적 요소를 가미하고, 기하학적 패턴을 넣고, 파스텔 톤으로 컬러링한다. 이런 독특한 방식과 발상으로 유럽 미술계에서 러브콜을 받는다.

오는 9월 '리옹비엔날레'에 초대받았다. 2025년에는 영국 버밍엄 '이콘 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열린다. 그녀 작품은 호주 빅토리아 멜버른 국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프랑스프락(FRAC)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슬기 I '쿤다리 거미(Kundari-Spider) B, Urethane coating on stainless steel 180×200×100cm 2021
 이슬기 I '쿤다리 거미(Kundari-Spider) B, Urethane coating on stainless steel 180×200×100cm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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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1층에 들어서면, '쿤다리' 연작을 볼 수 있다. '굽은 다리'를 빠르게 발음한 데서 나온 제목이다. 그녀는 공간을 채우기보다는 공간을 펼친다. 현대예술이 그렇지만 그녀에게 예술적으로 보이는 건 예술이 아니다. 오히려 빛바랜 평범한 사물에서 뜻밖의 것을 발견한다. 그녀는 남다른 시각의 해석으로 예술의 탄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위 작품은 역시 인류학적 관점이다.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선사시대 유물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등에서 볼 수 있는 과장된 여성성을 추상화한 것이다. 기존 미술개념을 뒤엎은 뒤샹의 면모도 보인다. 이 작품은 그 파스텔 색채에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한다. 그리고 순환을 상징하는 동그라미로 돼 있어 유쾌한 리듬감도 연출한다.

전시 키워드는 '구멍'
 
 이슬기 I 'K(계란코 Egg Noise)' Paper Mache 27×26×17cm 2024
 이슬기 I 'K(계란코 Egg Noise)' Paper Mache 27×26×17cm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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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는 이번 전시의 키워드로 '구멍(?)'을 잡은 듯하다. 몸에 '숨'구멍이 있어야 호흡을 잘 할 수 있듯, 정신을 차리게 하려면 '혼'구멍을 내야 하듯 답답한 세상에 구멍을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동양화에서 구멍은 공간에 여백을 주는 것이다. 혹은 험난한 세상에 길을 헤쳐 간다는 의미도 있다.

'구멍'은 일종의 돌파구로 안팎의 이분법을 지우고 한쪽으로 흐르는 보편적 인식과 감각의 관습을 뒤집어 새롭게 보게 한다. 이슬기의 이번 전시는 세상에서 모든 것이 하나의 의미나 분류로 규정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모든 것이 수치화, 혹은 경직화되기 쉬운 세상에 구멍은 필요하다. 예술가는 막힌 곳에 구멍을 내는 사람이다.

여기서 구멍의 의미는 뭔가? 무해한 성애의 은유로 볼 수 있다. '자크 라캉'의 말대로 진정한 성관계는 드물다. 거기에 구멍을 낸다. 우리에게 음담이 있듯이, 프랑스에서는 가벼운 성 농담가(La chanson légère 샹송 레제르)가 있단다. 다른 매체에서 작가 인터뷰를 보도했는데, 구멍에 대한 작가의 의도는 성적 뉘앙스를 풍긴다.

'이불 프로젝트: U', 촉각으로 속삭이기
 
 이슬기 I 'U(트집잡다) 진주명주, 통영 누비이불 장인과의 협업 195×155×1cm 2024(왼쪽), 이슬기 I 'U(부아가 나다) 195×155×1cm 2024(오른쪽) 진주명주, 통영 누비이불 장인과의 협업
 이슬기 I 'U(트집잡다) 진주명주, 통영 누비이불 장인과의 협업 195×155×1cm 2024(왼쪽), 이슬기 I 'U(부아가 나다) 195×155×1cm 2024(오른쪽) 진주명주, 통영 누비이불 장인과의 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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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불 프로젝트' 시리즈를 '에르메스'와 '이케아'와 협업을 해왔다. 이번에도 그 연장인 '이불 프로젝트: U'를 발표했다. 이번엔 통영 출신의 누비이불 장인들과 협업을 했다. 그런데 작가에게 '이불'이란 뭔가? 그녀에게 이불은 부드러운 촉각을 속삭이는 것이다. 작가는 "이불은 덮고 자는 것만 아니라 꿈을 꾸게 하는 주술적 조각"이라고 고백했다.

그녀는 이런 감미로움을 설치 미술로 치환하려고 한 셈이다. "이불이 예술이 되다니!" 싶어진다.

익숙한 일상 속에서 낯선 예술적 요소를 찾아내는 것 또한 현대미술의 문법이겠다. 작가는 위의 쿤다리 연작처럼 여기서도 성애적 원류를 다룬다. 누비이불 속에서 살가운 사랑을 나누는 '남녀상열지사'가 빠질 수는 없어 보인다. 그건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인간의 상상력이 아닌가.

'현판 프로젝트': 의성어의 시각화
 
 이슬기 I '현판 프로젝트(쿵쿵)' 홍송, 단청 140×180×4cm 2024
 이슬기 I '현판 프로젝트(쿵쿵)' 홍송, 단청 140×180×4cm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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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등장한 완전 신작은 '현판 프로젝트'다. 작가가 최근 한국에 몇 달 체류하며 고안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2019년부터 작업해온 '문'이라는 주제의 연장이다. 그녀에게 문은 '사람들 드나드는 장소'의 의미를 넘어 하나의 사건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가능성을 말한다. 앞에서 속담이 설치 미술이 되었듯, 작가는 의성어와 의태어를 현판화로 바꿨다.

작가는 덕수궁 대한문에 걸린 큰 현판을 보고 태초의 언어를 생각했단다. 그녀는 고궁에 한문으로 적힌 현판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말 의성어를 그 현판에 새겼다. 이 재료는 전통 가옥에서 많이 사용하는 4cm 두께의 '홍송'을 쓴다. 이 의성어를 양각으로 새기고, 기호화된 다른 글자 위에 겹쳐놓는다.

위 현판에 '쿵쿵'이라는 사물의 소리를 본뜬 의성어가 들어가 있다. 이 밖에도 '쾅쾅', '꿍꿍' 등이 적힌 작품도 있다. '사운드의 이미지화'다. 이것도 현대미술의 또 하나의 문법이다. 언어의 소리와 모양의 의미를 시각언어로 푼 것이다. 작가는 "한국어의 의성어는 그래픽 요소가 많다"라고 말했듯, 의성어의 청각요소를 그래픽으로 새겼다.

'격자 문살' 설치: 소리와 울림
 
 이슬기 I '느린 물(Slow Water) 나무 문살에 단청 채색 R 1100cm 2021. 문살 설치 작품.
 이슬기 I '느린 물(Slow Water) 나무 문살에 단청 채색 R 1100cm 2021. 문살 설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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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기 I '13332244' Douglas-fir 212×77.5×7.5cm 2020
 이슬기 I '13332244' Douglas-fir 212×77.5×7.5cm 2020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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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의 주특기 중 하나는 격자 문살 설치다. 소리를 시각화한 작품 '느린 물'은 2021년 '인천아트플랫폼'에서도 이미 선보였다. 이번에 이 갤러리에 맞게 장소 특정적으로 만들었다. 흐르는 물은 1층 전시장 위에서도 지하층 전시장 아래에서도 볼 수 있다. 전시장 아래란 수면 아래에서 본다는 의미도 된다.

길게 넓게 펼치는 방식으로 구성된 작품 '느린 물', 이 역시 장인들과 협업으로 완성됐다. 나무 문살에 단청으로 채색되었고 그 바닷물이 위에 햇빛이 일렁이는 것 같다. 이 작품은 고대 로마의 '빌라 디 리비아(Villa di Livia)'의 프레스코화에서 영감을 받았단다.

그리고 우리의 전통 문상을 연상시키는 격자로 된 직조 문살 작품 '13332244'는 느린 물과 다르게 직조의 '엮기' 방식이다. 이 문살 격자는 청각에 울림은 주는 악기의 효과를 내,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연주를 듣는 것 같다.

직조의 특성인 미세한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리듬도 일어난다. 그래서 음악이 된다. 거기다 격자무늬에는 그림자도 생기고, 기하학적 입체문양도 출렁인다.
 
 이슬기 I '모시 단청, 700×1000cm 2024. 모시 단청은 지하1층, 1층, 2층에서 다 볼 수 있다
 이슬기 I '모시 단청, 700×1000cm 2024. 모시 단청은 지하1층, 1층, 2층에서 다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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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지하층, 1층, 2층에서 연결되어 펼쳐지는 미니멀한 화풍의 '모시 단청'을 감상해보자. 이 작품은 전체 층에서 연결해 봐야 한다. '긋기 단청'이라는 단순한 전통 기법을 활용했다. 이 역시 단청 장인과 협업한 작품이다. 이 현대화된 모시 단청이 오방색 널판에 단아하게 펼쳐진다.

이 벽화는 마치 직물의 직조 체계 방식을 연상시키는 가로와 세로의 선이 조화롭게 짜인 작품이다. 전시장을 둘러보며 감상하다 보면, 지하층에서 2층까지 모든 작품이 서예에서 마치 횡서(가로쓰기)와 종서(세로쓰기)가 연결돼 보이듯, 두루 여러 장소에서 입체적 격자 효과를 주며 독특한 시각 세계를 선물한다.

덧붙이는 글 | -갤러리현대 홈페이지 https://www.galleryhyundai.com/main
-MMCA 작가와의 대화 | 이슬기 작가 / MMCA Artist Talk | Lee Seulgi (유튜브)


#이슬기#설치미술가#올해의작가상2020#이불프로젝트#미술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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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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