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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가 시끄럽습니다. 윤석열 정부 들어 새로 임명된 이충상, 김용원 상임위원이 인권단체와 언론들을 상대로 막말을 일삼아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 인권위 전현직 직원들이 두 상임위원에 대해 보고 들은 내용을 익명으로 보내와 몇 차례에 걸쳐 싣습니다. [편집자말]
국가인권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 국가인권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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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기구는 인류가 마주한 최대 위기를 해결하고 지속가능발전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의 중심에 있다. 인권 문화가 정착되는 것을 지원하고 각국 정부에게 인권에 대한 책임을 묻는 국가인권기구는 유엔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 중 하나다." - 안토니오 구테레스 유엔 사무총장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가인권기구의 역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인권위는 국제사회가 합의한 인권의 약속을 국내에서 이행하는 기구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인권위는 기본 사명이라 할 수 있는 역할의 도전을 받고 있다.

지난 4월 유엔 고문방지위원회에 제출할 고문방지협약 독립보고서 안건 논의 중, 이충상 위원은 "(특정 사안들에 관해) 유엔 자유권위원회·아동위원회·여성차별철폐위원회·고문방지위원회가 실적을 쌓고 선명성을 나타내기 위해 경쟁적으로 권고한다. 실제 그런 일들이 막 벌어지고 있다"는 말을 했으며 "(국가보안법 폐지 또는 개정에 관해)자꾸 국제사회의 권고를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국제사회 전반이 아니라 진보적 국제인권기구다. 여러 국제기구 중 진보적 인권기구가 권고한 거다.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대한민국이 자주적으로 결정할 일"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국가인권기구의 '독립성'을 핵심원칙으로 꼽는 파리원칙

해당 발언에 대해 국제사회에 대한 몰이해를 넘어, 외교적 결례라는 평가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국가인권기구의 탄생과 본질적 사명에 대해 짚어보려 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인간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은 1948년 세계인권선언의 채택과 함께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이행할 책임은 국가에게 있었지만, 국가는 그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국가의 인권 보호 및 존중 책임 여부를 감시하기 위한 시민사회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동시에 인권을 보장하는 국가의 의무 이행의 일환으로 국가인권기구 설립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91년, 파리에서 개최된 인권 보호와 증진을 위한 국제인권기구 국제워크숍에서는 국가인권기구가 가져야 할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논의가 처음으로 이뤄졌다. 그 결과 국가인권기구의 지위에 관한 원칙, 소위 파리원칙이 제정되었다. 파리원칙은 1993년 유엔총회에서 승인되면서 공식적인 국제 기준으로 인증되었고 현재까지 전 세계 국가인권기구들의 활동을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로 자리 잡고 있다.

국가인권기구는 국가 기관이지만 동시에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보장받아 국가를 감시하는 독특한 존재다. 언뜻 보면 시민단체인 것 같기도 하지만 시민단체보다 더 큰 자원과 정보 접근권을 갖고 있고, 또 어떻게 보면 국가 기관인 것도 같지만 동시에 각 정부 부처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고 할 수 있어야 하는 독립적인 기구다. 태생부터 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기구다. 그렇기 때문에 파리원칙은 국가인권기구의 '독립성'을 무엇보다 핵심적인 요소로 꼽는다.

전 세계 120개 국가인권기구는 정기적으로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GANHRI) 승인소위원회(SCA)에서 파리원칙에 따라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는지에 대한 심사를 받고, 그 여부에 따라 A등급 또는 B등급을 받는다. A등급을 받은 국가인권기구는 유엔 인권이사회에서의 발언권, 국가별 인권상황 정기검토(UPR) 회의 발언권, GANHRI 의사결정권 등의 권한을 부여받는다. 또한 등급에 상관없이 모든 국가인권기구는 당사국이 비준한 조약기구 심의에 독립 보고서를 제출할 수 있다. 보고서를 비롯하여 국가인권기구가 유엔에서 발표하는 입장은 정부와 시민사회 사이에서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입장을 제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유엔 사무총장이 국가인권기구를 '유엔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라고 지칭한 이유이기도 하다.

인권 퇴보 아닌 성장을 위한 방법

우리는 2004년 최초 심사에서 A등급을 받은 이후 2008년, 2016년, 2021년 모두 A등급을 받았다. 비록 2014년~2015년 위원 선출의 독립성 문제 등을 지적받아 세 차례 등급심사가 보류된 적은 있지만 적어도 파리원칙을 준수하는 독립적인 국가인권기구라는 평가를 국제사회로부터 받은 셈이다. 그렇지만 최근 몇몇 인권위원의 행보는 국제 사회에서 한국 인권위의 위상을 추락시키고 있다.

공공연하게 국제사회를 무시하고, 국가인권기구가 제출하는 독립 보고서를 정부 보고서와 다름없이 생각하며, 유엔에서 채택한 국제인권기준을 폄하하는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인권위의 보고서는 '독립적'으로 당사국의 인권상황을 감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를 비난하는 내용이 들어가는 것은 부적절하다'라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이미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이러한 인권위의 상황에 대해 인지하고 다음 행보를 주목하고 있다. 최근에 개최된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 심의(5월)와 고문방지협약 심의(7월)에서도 국가인권기구의 독립성 문제는 여지없이 제기되었다. 국제사회는 9월에 임명될 새 위원장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있다. 아시아 국가인권기구감시 네트워크(ANNI)에서는 파리원칙 및 국제 인권 기준에 따라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보호할 의지가 있는 사람을 위원장으로 임명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대통령에게 보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선도적 역할을 해 온 인권위가 무너져 내린다면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전체의 인권 상황에 위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인권위가 여성차별철폐협약 심의 당시 제출한 독립보고서에 몇몇 위원들의 반대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관련 부분이 삭제된 것과 관련하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난 2022년 말, 독립적인 유엔 인권 전문가들은 세계인권선언 75주년을 앞두고 모든 유엔 회원국에게 차별금지법의 제정, 시행 및 이행을 우선시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 정부는 수차례 국가별 인권상황 정기검토(UPR) 및 각종 조약기구 심의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조속한 시일 내에 제정할 것과 관련한 권고를 받기도 했다. 국제사회는 '인권 선진국'이라고 자칭하고 있는 한국에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놀라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평등법 제정을 위해 애써온 인권위가 이러한 노력을 계속하리라 믿고 있다.

2023년 인권이사회 이사국 선거에서 패배한 한국 정부는 올해 9월에 열리는 유엔 총회에서 다시 한번 선거에 도전한다. 국제사회에서 한 국가의 인권을 평가하는 여러 척도 중 하나는 독립적으로 국제 기준에 따라 활동하는 국가인권기구의 존재 여부다. 파리원칙에서 강조하고 있는 '독립성'을 지키고, 국제사회에서 이제까지 인권위가 쌓아온 위상을 바탕으로 리더십을 발휘 할 수 있을지 관심을 갖고 지켜볼 것이다. 국제인권기준에 따라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위원장이 임명되는 것이 바로 한국 정부가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할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척도다.

인권의 역사는 한시도 쉬지 않고 굴러가고 있다. 때로는 느리게 가기도 하고, 멈춘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인권의 증진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멈춘 적은 없다. 인권위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뒤로 가지 않고, 앞으로 가는 것. 퇴보가 아닌 성장을 위한 방법은 간단하다. 국제사회 기준에 따르면 된다.

#인권위#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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