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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발을 딛고 살며,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지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 범위는 서울이 중심이 될 것이며 또 서울의 해당 지명에 조응하는 전국의 지명들을 함께 비교 검토할 것이다. 단순히 지명 유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지역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 등을 함께 이야기 하며 그 곳에서 벌어진 우리의 역사를 상상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자 한다.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서촌을 걷는다> 등 서울의 도시 탐방에 관한 책을 쓴 바 있다.[기자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서울 탐방을 통한 지명 유래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그 시작은 조선의 한양천도 이후 현재까지 서울의 중심 역할을 해온 광화문네거리에서 시작하기로 한다. 우리의 도로법은 서울의 기준점을 뜻하는 '도로원표'의 기준을 광화문네거리로 삼고 있다. 즉 우리의 수도가 서울이며 그 중에서도 서울의 기준점이 광화문네거리인 셈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도로원표가 위치한 법정동, 즉 '세종로'를 이 글의 출발점으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법정동으로서의 종로구 '세종로'
 법정동으로서의 종로구 '세종로'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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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동으로 '세종로'는 광화문네거리부터 북쪽으로 광화문광장, 경복궁, 청와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광화문통(光化門通)'으로 불리던 것을 해방 후 1946년 일본식지명을 정리하면서 세종대왕이 인근의 준수방(俊秀坊, 종로구 통인동 일대)에서 태어났고, 또 한글창제 등 그의 업적이 대단하여 세종의 묘호를 빌어 '세종로'로 고친 것이다(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인 통(通)은 우리의 로(路)에 해당하며, 정(町)은 우리의 동(洞)에 해당한다. 따라서 1946년 일제강점기 사용되었던 ~통(通)과 ~정(町)을 ~로(路)와 ~동(洞)으로 일제히 바꾸었다).

참고로 일제강점기 '세종로 1번지'는 조선총독부가 위치한 곳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그 공간을 차지한 중앙청이 이어받았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그 1번지는 청와대로 바뀌었고, 또 1995년 옛 총독부건물조차 철거했지만 세종로 1번지는 경복궁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청와대 자리에 부여되어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1968년 1.21청와대습격 사건 이후 전국민의 감시와 통제를 위하여 같은 해 11월 주민번호라는 개인별 고유번호를 부여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받은 번호는 각각 110101-100001과 110101-200002였다.
 
 1968년 주민등록번호를 최초로 도입할 당시 주민번호의 기입체계, 당시에는 앞번호 6자리가 생년월일이 아니라 거주지역을 표시했다.
 1968년 주민등록번호를 최초로 도입할 당시 주민번호의 기입체계, 당시에는 앞번호 6자리가 생년월일이 아니라 거주지역을 표시했다.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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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당시의 주민번호 배열방식은 지금과 달랐다. 이 방식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가족의 주민번호를 모두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과 관련된 전국 지명들.

▷ 경기도 여주군 세종대왕면 : 세종대왕을 모신 영릉의 서쪽에 위치한다 하여 본래 능서면(陵西面)이라 하던 것을 2021년 12월 세종대왕면으로 개칭하였다.

▷ 세종특별자치시 세종동 : 인구가 증가하면서 2023년 3월 새롬동에서 분리 신설되었으며, 세종시이기에 세종동이라 작명 되었을 뿐 세종대왕과 특별한 인연은 알려진 바 없다.

'세종로'의 역사적 변천 과정 
 시대별로 본 종로구 세종로의 변천과정
 시대별로 본 종로구 세종로의 변천과정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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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경복궁-광화문광장 등 법정동 세종로를 차지하고 있는 세 곳가운데 광화문광장의 변화를 살펴보면 위 사진과 같다. 이 가운데 이 곳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몇 곳만 간단히 보충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기로소(耆老所)
쉬운 말로 표현하면 나이 먹어(51세) 퇴임한 고위관료들을 위한 국립경로당에 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1765년(영조41)부터 국왕도 참여하면서 관부서열 1위로 법제화되었다.

▷ 기념비전(紀念碑殿)
 
 1902년 고종이 왕이 된지 40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가 모셔진 '기념비전' '도로원표'도 1935년 이곳에 옮겨져 있다.
 1902년 고종이 왕이 된지 40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가 모셔진 '기념비전' '도로원표'도 1935년 이곳에 옮겨져 있다.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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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고종이 왕으로 등극한 지 40년을 기념한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를 보존하고 있는 전각으로 왕과 관련된 건축물이기에 '기념비각'이 아니라 '기념비전'이라 명명된 것이다.

유교사회에서는 건축물도 각 기능과 역할에 따라 건물명칭 뒤에 전당합각제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 가운데 한 글자를 따서 붙이는데 그 중 '전(殿)'은 임금이나 왕비와 관련된 건물에 붙는 명칭이다. 한편 1902년은 고종 역시 51세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가게 된 것도 함께 기념하고 있다.

▷ 도로원표(道路元標)

위 그림 속 붉은 점은 앞서 설명한 도로원표가 1914년 처음 위치했던 곳일 뿐만 아니라 현재 표석은 옮겨졌어도 법률상 서울의 도로원표의 기준점이 되는 곳이다. 당시 설치된 표석은 1935년 길 옆에 위치한 칭경기념비전 옆으로 옮겨졌고, 1997년 현재 광화문빌딩 남쪽 세종로파출소 앞에 새롭게 설치해 놓았다.
 
 도로원표에 대한 남북 각각의 모습. 사딘 속 평양의 '나라길시작점' 바로 위가 김일성광장의 주석단이며, 서울의 도로원표는 현재 광화문네거이 세종로파출소 앞에 설치되어 있다.
 도로원표에 대한 남북 각각의 모습. 사딘 속 평양의 '나라길시작점' 바로 위가 김일성광장의 주석단이며, 서울의 도로원표는 현재 광화문네거이 세종로파출소 앞에 설치되어 있다.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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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북한은 평양시 김일성광장 주석단 바로 아래 위치해 있으며 그 이름도 일본이 작명한 도로원표가 아니라 순 우리말로 '나라길 시작점'이라고 한다. 그리고 미국은 워싱턴 백악관 앞에 위치해 있으며 그 명칭은 제로마일스톤(Zero Milestone, Kilometre zero)이다. 또 프랑스는 노트르담 성당 앞에 설치되었으며 명칭은 제로 포인트(Zero Point, (프랑스어)Point zéro (topographie))이다.

▷ 경기도청
 
 1930년대 경기도청의 모습|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일본지리풍속대계-조선편, 신광사, 1930
 1930년대 경기도청의 모습|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일본지리풍속대계-조선편, 신광사, 1930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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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직후 한성부가 경기도 산하의 경성부로 강등되고 바로 그 해 경기도청을 이곳에 설치하였다. 참고로 광화문으로 오기 전 조선시대 경기감영은 한양도성 밖 지금의 지하철 서대문역 인근의 적십자병원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후 갑오개혁을 거치며 1896년 경기도 수원으로 이전했다가 14년 뒤 서울로, 그것도 가장 핵심인 경복궁 바로 앞으로 온 것이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1946년 서울은 서울특별시가 되고 경기도와 분리되었지만 경기도청은 계속 광화문에 위치하였다가 1967년 6월에야 경기도 수원으로 이전하였다.

▷ 경성법학전문대학

1895년 최초의 국립법학교육기관으로 '법관양성소'란 이름으로 설립되었으며, 1903년 위 그림 속에 위치한 광화문 육조거리 가운데 호조 건물로 이전하였다. 경술국치 후 여러 번화를 겪다 1922년 관립 경성법학전문학교로 승격되면서 3년제 전문학교로 개교하였고, 1937년 청량리로 이전하였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의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에 따라 6년 과정의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함께 지금의 서울대 법대를 이루게 되었다.

▷ 세종문화회관
 
 1972년 12월 3일자 한국일보. 이렇게 전소된 서울시민회관 자리에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이 건설된 것이다.
 1972년 12월 3일자 한국일보. 이렇게 전소된 서울시민회관 자리에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이 건설된 것이다.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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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이곳은 1956년 이승만정권 시절 그의 호를 따서 '우남회관'으로 착공하여 1960년 예정 준공일과 맞춰 그 때 있은 대통령선거 후 취임식을 이곳에서 개최하려고 하였지만 4.19로 무산되었고, 그 이듬해 준공된 '서울시민회관'이 있던 곳이다. 하지만 1972년 12월 'MBC 10대가수 청백전'이 열리던 중 화재로 전소되고 1978년 세종문화회관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지어진 건물이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962년도 국가재건최고회의 시무식에서 연설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모습. 당시 최고회의가 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입주해 있었다.
 1962년도 국가재건최고회의 시무식에서 연설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모습. 당시 최고회의가 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입주해 있었다.
ⓒ 대통령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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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현 미대사관 건물과 함께 1961년 같은 시기에, 같은 설계로 건설된 쌍둥이 건물이다. 마침 준공시기에 5.16쿠데타가 일어나 이곳을 제일 먼저 사용한 기관은 쿠데타세력인 '국가재건최고회의'며, 3층 북동쪽(경복궁쪽) 끝 방은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가 쓰던 방이다.

그 후 이 건물은 경제기획원, 재무부 등 여러 행정기관들이 사용하였고, 맨 마지막 사용한 주체는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가 사용했으며, 해당 장관들이 박정희의 방을 이어받아 사용했다.

#서울지명유래#서울동명유래#세종로#광화문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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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2015), 『서촌을 걷는다』(2018) 등 서울역사에 관한 저술 및 서울관련 기사들을 《한겨레신문》에 약 2년간 연재하였다. 한편 남북의 자유왕래를 꿈꾸며 서울 뿐만 아니라 평양에 관하여서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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